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태복음10장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 를 몇일 전에 묵상하셨죠. 의미상 같은 내용입니다. 이런 모양을 샌드위치 기법이라고 말씀드렸죠? 중요한 내용을 가운데 넣고 위, 아래로 좋은 빵인 설명으로 감싼 구조입니다. 그래서 마10:21과 마10:34절이 빵이 되고, 그 안에 중요한 내용이 들어가 있었죠. 묵상을 건너뛴 분들은 마태복음10장21절 묵상을 찾아서 보세요.
오늘 말씀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가르치는 이단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부모도, 자식도 다 버리고 교회에 투신하죠. 심지어 그런 자칭 사명감(?) 좋은 교회가 부흥(?)이 잘 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아무리 복음을 말해도 결코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가 그들을 설득하여 복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실 일이죠. 이 글 조차도 그냥 표지판의 역할 뿐입니다. 즉, 선택된 자라면 성령께서 눈을 뜨게 하셔서 여러 표지판들을 통해 복음의 길에 들어서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표지판이 돋보이려고 발꿈치를 드는 것은 자기가 성령의 역할을 하려고 하는 꼴이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늘 그것에 두려움을 갖져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건, 교회 봉사를 하건 그 이후에 그것을 듣고, 목격한 많은 자들이 '예수님를 보고 있는가?'를 늘 고민하셔야합니다. 반대로 '내가 잘하고 있는가?'를 고민하시면 안됩니다. 심지어 성령께서는 목사를 더럽혀서 그것을 사용해 복음을 설명하시기도 합니다. 이 방향성을 유지하지 못하시겠으면 지도자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야합니다.
((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 남편을 살인하는 죄를 통해 하나님은 복음을 설명하시죠. 그런데 다윗이 이것을 눈치채고 '난 휼륭한 왕으로 남을 것이야'라고 마음먹고 이 죄악된 사건들을 피했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그 부분만큼 하나님의 복음설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밧세바를 통해 낳은 솔로몬도 없었겠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왕조도 없었겠죠. 그리고 기독교도 없었겠죠. 그리고 지금 나의 구원도 없었겠죠. ---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조그마한 머리로 알 수가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신 이유가 바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했죠. 그런데 복음의 첫 관문은 바로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인이란 ‘살인, 도둑질, 거짓말’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죄가 아니라 죄의 증상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증상이죠. 폐암에 걸리면 '기침' 이라는 증상이 나옵니다. 인본주의는 이 '기침'을 많이 할 수록 죄인이라고 비판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폐암'선고를 받은 자라고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 같은 폐암 환자이지만 그 사람의 집안 환경과 기관지 상태에 따라 기침의 정도가 다 다르듯이 사람은 환경에 따라 이 죄의 증상이 차이가 나죠. 이것을 가지고 내가 너보다 증상이 약하니까 나는 너보다 ‘의롭다.’ 착하다‘ ’잘하고 있다.‘ 라고 자기위안삼죠. 하지만 성경은 이것을 '외식'한다고 표현하죠.
그런데 선택받은 자들은 반대로 썩어 있는 폐가 보입니다. 나와 타인 즉, 인간 모두는 속까지 썩어있는 죄인이라는 것이 보이죠. 그리고 그것을 고민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이것에서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의 무가치함, 무능력함을 깨닫게 되죠. 이것이 '나는 죄인입니다.'의 본질입니다. 천국가기위한 조건이 아니라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을 뜻하죠.
이런 방식으로, 이런 단계를 거쳐 그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무가치함을 알게된 자)’가 됩니다. 이런 이자들은 필히 ‘애통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위로를 받게 되죠. 그 때서야 '오직 '의'이시면서 온유하신 예수님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굶주린 자'가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본인을 먹여주셔서 우리는 '배부른 자'가 됩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긍휼히 여김받게 되어 청결한 자'의 삶을 살게 되죠. 즉, 인본주의와 복음의 분리 즉, 죄라는 더러움에서 분리되는 청결한 삶을 알게 되죠. 그때서야 비소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어 진정한 천국의 삶인 '하나님과 관계있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은 필히 이 땅에 사는 동안 '박해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천국을 소유한 자의 삶의 증거라고 하나님을 설명하시죠. (마태복음 5장 참조)
죄의 근본적 정의는 하나님과 분리된 것을 의미합니다.(우리가 생각하는 증상으로써의 죄(살인,간음,거짓말....)를 생각하지 마세요.) 이렇게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이 그들 스스로 잘 살아 보겠다고 표방하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인간 한 명에 국한해서 보게 되면 ‘이기주의’가 되고 인류 전체로 보면 ‘인본주의’가 되는 것이죠. 이 두 가지는 범위만 다를 뿐 본질은 같습니다. 즉, 세상을 위해 죽어간 영웅이나 나만 위해 죽은 사람이나 본질이 같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신본주의(하나님주의)를 떠난 인본주의를 죄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세요. ‘가족’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가장 좋은 도구입니다. 즉,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설명 하시고 남편와 아내를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하셨죠. 그런데 인본주의 쪽에서 보면 가족은 인본주의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재미있죠? 가족을 바라보는 관점이 정확하게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관점에 따라 두 가지로 갈릴 수 밖에 없죠.
가족은 ‘인본주의’에서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로 존재합니다. 즉, ‘나의 확장’의 최초 구성원이죠. 그래서 여기에 복음이 떨어지면 이렇게 분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와 유기된 자 사이에 가족의 의미가 갈라지게 되는 것이죠. 그것을 오늘의 말씀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본질이 아닙니다. 더 깊은 말씀의 본질은 나의 가족은 ‘나의 확장’이기 때문에 결국 이 가족간 분리와 싸움은 ‘거듭난 나’와 ‘나의 옛자아’와의 분리와 싸움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라고 나오죠. 즉, '거듭난 나'의 원수는 결국 '나의 옛자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족이라는 외적 환경을 통해 객관화시켜 보고, 경험하게 하신 것 뿐이죠. 그래서 마지막 말씀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입니다. 외적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라는 것이죠. '자기십자가'란 바로 ‘나의 옛자아에게 박해 받으며 살아가는 것' 을 뜻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