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오늘부터 마태복음 11장입니다. 마태복음10장은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전도파견하시면서 당부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11장 첫 구절을 보면, 제자들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전도하시기 위해 떠나신다고 나오죠. 마태복음 10장의 제자파견은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을 이 세상에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파견보낸 것을 가리키고 더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 보면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선언하고 세례까지 준 인물입니다. 이 때 ‘도대체 요한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라는 의문을 품으시면 안됩니다. 이런 의문은 불필요한 누룩입니다. 성경은 절대 성경의 인물에 대하여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은 예수님과 나의 관계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과 사건은 오직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성경이 설명하지 않는 인물을 우리가 예측하는 것은 100% 누룩이 들어가서 인본주의적 해석을 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의 범위에서 요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옥에 갖혀있다는 것입니다. ‘감옥’의 의미는 죄진 자를 가두는 역할을 하죠.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아! 요한이 다시 인본주의에 묶여 버린 역할을 하고 있구나! ’ 라고 알아듣고 하나님께서 그 상태를 이용해서 설명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만 집중해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요한)은 인본주의에 묶여 버리면 절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볼 수가 없습니다. 끝임없이 의심하게 되죠.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조금 이상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맞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시죠.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큰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자세히 알아보죠.
교회에서 ‘예수를 믿는다.’라는 것을 대부분 어떻게 인식할까요? 예수님이라는 신을 상상하고 ‘믿음’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게 십계명 중 제 3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정체성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잘못된 말입니다. 정확하게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믿는다.’가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때문에 “무엇을” 믿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복음입니다. 정확하게는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맹인, 나병환자, 못 듣는 자, 죽은 자, 가난 한 자”의 뜻은 복음적으로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의 속성을 가리킵니다.
예수를 알아 보지 못하는 자 =맹인, 죄가 있어도 못 느끼는 자 = 나병환자, 복음을 못 알아 듣는 자 = 못 듣는 자, 죄인의 상태 = 죽은 자, 무가치한 자 = 가난 한 자를 뜻합니다.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죠. 즉, 복음이 전파되면 이것을 알아듣게 되고, 보게 되고,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리스도가 맞아’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5절과 같이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예수 = 복음의 주인공 = 그러므로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된 자들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고로 이 말씀을 직설적으로 말하면 “요한아 네가 복음을 알아듣는 자라면 이 대답을 통해 복음이 해석되어 내가 누군지 알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6절을 보면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로 설명하시죠. ‘실족’이란 교회에 다니다가 잠시 세상 유흥문화에 빠지는 저급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족이란 성경이 이해가 되고 예수가 믿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낀 사람들은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지만 결국 그 실체인 복음을 알아듣지 못한 상태가 되면 아무소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실족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하시기 위해 그 유명한 ‘요한’조차 ‘옥’이라는 인본주의에 다시 묶어서 그리스도를 의심하는 인간의 역활로 만들어버리신 것입니다. 즉, 평생 신실한 교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알아듣는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 분을 상상속의 신으로 만들어 내지 말고 성경이 말하는 그 분의 진짜 정체성을 알게 된 자가 되십시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