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많은 크리스챤들이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 바쳐 순교하면 천국에 갈 것이다.’라고 알고 계시죠. 완벽하게 잘못된 방향성을 가진 인본주의 종교입니다. 여기서 ‘자기 목숨’이란 ‘나의 옛자아’를 가리킵니다. 즉, 이 말은 인본주의에 속한 나의 옛자아와 분리가 되어야만 영적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인본주의에서 ‘잘살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을 뜻합니다. 이런 자들은 ‘잃을 것이요’라고 하죠. 참 생명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잘살기'란 흔히 말하는 잘먹고 잘살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도덕, 명예, 지위, 칭찬 속에서 박수 받으면서 잘사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우리는 과연 복음에서 말하는 순교를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습니다. 순교는 오직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우리는 절대 순교할 수 없는 존재구나~~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셨구나"를 알게 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확실하게 알려면 순교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말씀대로 살아야겠죠. 그래야 순교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게 되겠죠.
' 아닌데! 선배 신앙인들 중에서 순교한 자들이 많은데! ' 라고 생각하시면 아직도 복음을 잘 모르는 것이고, 아직도 옛자아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순교의 모양은 'give and take'(주고 받기)의 형태에서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순교는 기독교 뿐 아니라 타 종교에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이슬람을 보세요. 그들은 웃으면서 자신의 가슴에 달린 폭탄을 터트리면서 순교(?)합니다. 노조원들 중에서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붓고 순교(?)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순교는 돈이 아닌 명예, 전체의 이익, 사후받을 이익(천국)에 전부 근거합니다. 참순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순교는 나를 죽이는 원수를 위해 내가 지옥을 대신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이것을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 지시고 우리 대신 지옥을 가신 것입니다. 우리 대신 진짜 죽음을 당하신 것이죠. 우리와 다르게 시간의 개념을 초월한 예수님의 세계는 3일동안 잠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대신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지옥"을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고백을 하시게 되죠.
"마27:46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실제로 요한을 제외한 예수님의 모든 제자는 전부 순교(?)를 당하지만 성경은 희안하게도 대부분 이것을 숨겨버립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면 안 되기 때문이며, 순교라 칭함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몇몇 인물이 박해와 순교 당하는 장면이 제한되게 나오긴 하지만 그 초점은 전부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의 역할 뿐입니다.
대표적으로 스데반 집사의 순교(순교 아닙니다. 죽음입니다.)를 한 번 살펴보세요. 복음을 전하는 부분이 매우 길게 나오면서 그 복음에만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 후 스데반 집사를 죽이신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순교의 의미와 반대로 ‘스데반 집사에게 집중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만약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초점화 시키려면 스데반집사의 순교 이후 이자를 영웅화 시키는 장면이 나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죠. 오히려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 기독교인들은 두려워서 뿔뿔이 다른 지역으로 흩어집니다. (이 흩어짐을 통해 복음이 확산되는 역사가 일어나죠.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지 않습니까?) 또한 스데반은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죽죠 즉, 스데반 조차 그 초점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있으니 이 글을 읽는 너희들도 오직 초점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의 촛점이 나와 인간(스데반)에게 있으니 모든 복음이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께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라고 하죠. 여기서 나오는 ‘너희’는 ‘복음으로 해석 된 자들’를 가리키죠. 이 부분을 교회에서는 '크리스챤을 잘 대접하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죠. 이런 것은 전부 다 이단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복음으로 해석된 자들을 영접한다는 것은 바로 그 자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을 받아드리게 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영접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다음 말이 바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 의인을 영접하는 자~~~’의 말씀이 나온 것이죠. 선지자, 의인은 전부 '복음으로 해석된 자'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말씀을 보죠.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제자도 복음으로 해석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자’가 나옵니다. 이 작은 자의 정체는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복음으로 해석된 자들이 예수님께 복음을 준다.?' 조금 이상하죠? 해석이 조금 어렵습니다. 잘 따라오세요.
일단 예수님이 왜 작은 자로 표현되었는지 알아보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죠. 가장 큰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티끌보다 못한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작은 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티끌보다 못한 죄인의 실체는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이 ‘나’로 오신 것이죠. 정리하면, 이 작은 자는 예수님이신데, 그 작은 자의 실체는 ‘나’인 것 입니다. 어렵죠? 복음의 눈으로 나와 예수님이 한 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절대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씀입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잘 들으세요.
이 말씀은 결국 예수님이 예수님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됩니다. 즉, 복음을 전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시고, 복음을 받을 수 있게 그 자대신 ‘작은 자’로 오신 분도 예수님인 것이죠. 즉, 1부터 100까지 전부 예수님 홀로 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냉수 한 그릇'이라고 표현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아니라면 인간은 '작은 자'에게 결코 선의의 냉수 한 그릇도 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냉수는 인간의 측면에서 보면 '불가능'을 이야기하고 있고, 예수님의 측면에서 보면 얼마든지 줄 수 있는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의적(이중의미)'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어려웠죠?
성경은 복음에 대하여 계획하신 것도, 전달하신 것도, 전달 받는 것도 전부 다 예수님이 홀로 이루시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떡 끄떡만 할 수 있는 오직 은혜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해서든지 여기에 나의 행위를 포함시키려고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가?’에 맞추어서 성경을 읽고 인생을 살며 신앙생활을 하죠. 그런데 이것이 바로 어떻게 말씀에 누룩을 포함시킬 것이가를 고민하는 인본주의 종교가 되는 과정입니다.
오늘도 이번주 교회에 낼 헌금을 고민하시나요? 교회봉사를 고민하나요? 교회의 인간관계에 고민하나요?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는 이미 누룩 투성이가 되어 있죠. 오직 '예수님'께 집중하세요. 예수님의 스토리인 복음에만 집중하세요. 그러면 보입니다. 성경과 인생과 역사가 온통 예수님의 스토리로만 짜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분이 곧 나로 오셔서 이미 사셨고, 이미 다 이루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정한 신앙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과거에 완성하신 것을 확인하는 것 뿐입니다. 미래의 의미는 다시 한번 이 기회를 갖게 되는 것 뿐이죠. 기회를 80년 정도 주는 것입니다 .
이미 '당신은 복음으로 완성되었다니까요~~~' 그것을 확인하세요. 이것이 확인되는 순간 '평강'을 알게 됩니다 .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복음의 눈을 뜨신 분들은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 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마시고 오직 " 마음이 가난한 자"를 중심으로 전파해 주세요.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복음에 눈을 뜨고 이 글을 묵상하는 분들은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감당하기 어려운 박해를 받게 됩니다.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