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그들이 떠나매’에서 그들은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어제 묵상에서 이들은 인본주의에 묶인 요한의 상태를 대표한 자들로 나오죠. 예수님의 복음 설명이 끝나자마자 ‘그들이 떠나매’라고 표현되어 있죠.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복음을 대하면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떠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무리들만 남죠. 이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교회에 자리를 채우는 것이 부흥이 아니라 교회에서 선택받은 자, 곧 복음을 알아듣는 자를 골라내는 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코로나는 이것을 골라내는 하나님의 섭리 중 하나일 것입니다. 즉, 코로나로 교회에 못 가게 되었을 경우, 교회에 집착하는가? 예수님에 집착하는가?)
‘갈대’는 로마 화폐를 말하는 대명사(로마 화폐에 갈대가 그려있습니다.)이고, 왕궁의 부드러운 옷은 권력입니다. 고로 이 말씀은 “너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잘살기’에 초점이 있느냐?”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냐?' 라고 하시죠. 그러면서 그것이 옳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지자의 정의에 대하여 설명하십니다.
요한이 바로 선지자의 대표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이 요한은 말씀의 목표가 아니라 말씀의 표지판 역할이라고 하시죠. 그리고 모든 표지판 중에서 가장 큰 표지판이라고 정의해 주시죠. 즉,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바로 이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이 가장 큰 표지판일까요?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리킨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요한이 큰 자’라고 여김 받은 기준은 요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준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갑자기 ‘천국에서는 이렇게 큰 자로 여김받은 자도 가장 작은 자보다 크지 않다’고 하죠. 왜일까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분을 가리키는 역할을 맡았더라도 그 분의 지체 즉, 그 분과 한 몸이 된 선택받은 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라고 하는 말씀은 표지판이라는 역활의 유효기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표지판의 유효기간은 예수님이 오시면서 다 끝났습니다. 또한 ‘엘리야가 요한이다.’라고 한 것도 엘리야나 요한이나 모든 선지자는 전부 동등한 표지판의 역할일 뿐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서 '모든 표지판의 유효기간은 다 끝났다'라는 말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안식일(주일), 할례, 제사, 절기, 세례, 제사장, 왕 등등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 역활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계속 기념하라는 성찬식도 그 당시 에피소드로 끝난 표지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계속 기념하라’라고 말씀하신 본질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라는 복음을 매일생각(계속기념)하라는 뜻입니다. 즉, 교회에서 떡과 포도주 먹으면서 ‘거룩한 척’ 마음먹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고개를 내려서 성경을 읽고 그 안에서 예수님을 먹고 복음을 알아듣는 것이 더 올바른 방향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면 신앙생활을 3단계로 진행시키고 계시죠. 즉,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1. '잘살기 원함' 에서 출발하여, 2. '종교'로써 말씀을 지키다가, 3. '복음'을 알아듣게 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인' 에서 '복음을 알아듣게 되는 자'의 차이는 "성화"에 대한 인식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성화를 "예수를 믿고 성스러운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자"로 알고 있는 분들은 아직 '종교인'인 것이고, 성화를 "우리는 단 1도 성화를 할 수가 없는 존재이므로 예수님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것 뿐이 없구나~~"를 알게 된 분들이 바로 복음을 알아듣게 된 자입니다.
((그렇다고 성찬식 자체를 거부하진 마시고 그냥 프로그램이려니 하고 참여하세요. 그나마 좋은 점은 성찬식 중에 ‘말씀을 읽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읽어주는 이 말씀을 복음으로 해석하여 예수님의 진정한 피와 살을 먹으십시오. 이렇게 인본주의 종교에서 행하는 행위는 본받지 마시고 그들이 읽어주는 말씀에는 집중하세요. ))
“마태복음23:3상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라는 말씀은 ‘ 마지막 표지판인 요한이 가리킨 예수님의 시대부터는’ 이라는 뜻입니다. 이 때에는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리라’고 합니다.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강제적(침노하여)으로 관계를 맺어서 천국을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죠. 감리교가 이 부분이 장로교와 다르죠. 그들은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 때 우리도 손을 내밀어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가르치죠. 이단성이 있는 말입니다.
재미있게도 감리교 내에서도 이것에 대한 모순을 느끼면서 복음을 알아듣게 된 자들이 있다는 것이죠. 순복음에서 방언에 대한 모순을 느끼면서 복음을 알아듣게 된 자들이 있죠. 장로교도 수 많은 교칙들에 모순을 느끼면서 복음을 알아듣게 된 자들이 생기죠. 신기하게 참구원을 받은 자들의 모습은 거의 흡사합니다. 반대로 유기된 자들은 기존 인본주의 종교(기독교)에 매몰되죠. 그것을 '거울'로 보게 하시는 장면이 가끔 TV에 이상한 목사들이 나와도 그것에 열열히 추종하는 교인들의 모습이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면서 '너가 바로 저 상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래도 그들만 욕할 뿐 절대 '나의 상태를 보지 못합니다.'
1517년 종교개혁도 마찬가지 입니다. 당시 교회는 전부 다 이단화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단 몇명의 '복음을 듣는 자'가 나와서 뒤집어 놓았죠. 당시에는 구원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지경까지 갔었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인간은 항상 말씀을 '이단화'시키고, '종교화(인본주의화 프로그램)' 시킵니다. 여기에는 단 한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 즉, '인간'이 아닌 오직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나를 부인한다'는 말은 내가 바뀌고, 내가 변하고, 내가 참고, 내가 이해하고, 내가 알아 듣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저도 100%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지만 지금의 제 수준에서 가능한 가깝게 설명드린다면 "이미 나는 2천년 전 예수님으로 살았다" 입니다. 그래서 지금 어떤 '충격'이 오면 '현재의 리엑션'으로 반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 그 때 예수님이 이렇게 하셔서 이미 끝난 상황이지~'라는 해석이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런 설명도 비슷할 뿐 정답은 아닙니다. 공간과 시간을 초월할 수 없는 유한한 우리의 한계죠. 그리고 더 정답에 가까운 것은 우리의 이러한 최종적인 '복음을 알게 됨' 자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은혜'가 누구를 비치고 있는가? 입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를 기억하고 생각하고 계시는가?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우편 강도의 고백이 "저를 기억하소서"였죠. 완벽한 "복음의 정수" 입니다. 이 자가 하나님께 가장 확실하게 천국을 약속받은 자입니다. 이 자가 예수님의 최후의 대인사역이었죠. 이 자를 왜 최후의 대인사역으로 선택하셨는가? 묵상해보세요.
"눅23:42-43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