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어제의 묵상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노아의 방주가 끝나고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사람을 물로 심판하기 않겠다고 약속을 하시면서 무지개를 보여주시죠. 이 무지개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즉, 무지개는 심판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구원을 하시겠다는 표지판이지요.
예수님을 가리키는 가장 핵심적인 표지판이 바로 ‘빛’입니다. 그런데 빛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프리즘 '이라는 현상을 통하여 빛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셨죠. 이것이 무지개 입니다. 죄인이 절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이 땅에 내려오게 하신 것이죠. 정리하면, 예수님으로 인하여 복음으로 구원하겠다라는 증표가 바로 무지개인 것이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묻죠. ‘주일에 회사 나가는 것이 옳으냐? ’ ‘ 주일에 예배 빠지는 것이 옳으냐? ’ ‘주일에 돈 쓰는 것이 옳으냐? ’ 전부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절대, 죽어도, 이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틀렸다, 맞았다"의 영역에 묶어버리는 것이죠. 그렇게 묶어서 정말 목표를 볼 수 없도록 만드는 사탄의 고급기법입니다.
무지개는 여러가지 색깔로 우리에게 보이죠. 빛 되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다양한 표지판들이 역사 속에서, 말씀 속에서, 성경 속에서, 인생 속에서 우리에게 매우 다양한 색깔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안식일도 그 색깔 중 한가지입니다.
안식일의 가장 기초적 의미는 ‘ 일하지 말고 쉬어라 ’입니다. 즉,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전부 이룰 것이니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단지 다 이루신 예수님의 품으로 들어가서 쉬라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6'이라는 이 땅의 인생에서 벗어나서 '7'이라는 천국인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생동안 7일이라는 한주간을 반복하게 하신 이유는 '7일에 한번은 꼭 쉬어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품'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잔소리를 계속 반복하시는 것이지요. 부모님이 가장 많이 하는 잔소리를 잘 생각해보면 그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게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안식일의 본질을 가리키고, 가르치고, 변질을 막기 위해서 ‘안식일’이라는 ‘시간과 날’의 개념을 형식에 맞추어서 어쩔 수 없이 지키게 하였죠. 그런데 이제는 그 안식일이 가리키는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초기 교회에서는 토요일인 안식일을 폐하여 버렸죠. 그리고 부활하신 일요일을 기념하는 것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했던 의미는 안식일이란 ‘날짜와 시간이 상관없다.’ 오직 매 순간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한다.’의 의미를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 일요일을 주일로 바꾸고 다시 주일성수로 바꾸면서 주일에 물건도 사지 말고, 일도 하지 않는 날로 지켜내는 종교가 만들어 지고 있죠. 그리고 이렇게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들을 교회에서는 박수치며 추켜세웁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주일을 잘 지키지 못한 자들은 마음에 짐이 생기죠. 이미 예수님이 만든 교회가 아닙니다.
이런 분들도 있습니다. 안식일의 실체가 예수님이라는 것도 이해했고, 일단 교회에서 주일을 지키라고 했으니 이것도 힘써 지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복음의 특성 상 인본주의와 복음은 절대 같이 놓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성경은 매우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계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마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이들은 이렇게 복음을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인본주의 종교에 묶여서 양쪽 전부 “노력”하는 것을 스스로 매우 합리적이고,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노력한 자가 성경에 등장하죠. 니고데모입니다. 이 자는 늘 ‘밤’에만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을 변호합니다. 그런데 그들 안에 늘 묶여있는 장면으로 묘사되죠. 이 자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예수님의 시체’와 같이 있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즉, '죽은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죠.
복음은 완벽하게 인본주의와 분리되지 않는 한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선택된 자들도 이 땅에 사는 동안 '나의 옛자아'는 인본주의에 묶여 있죠. 역설적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내가 이런 나의 옛자아를 불쌍하게 볼 수 있는 자가 바로 복음의 진영에 있는 자입니다. 즉, 나의 자아 둘이 분리가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정확하게는 영적영역이므로 이해만 하시면 됩니다. )
테스트를 해보세요! 회사, 가족, 인생에 묶여서 그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것을 즐거워 할 때, 어떤 사람이 고지식한 복음으로 그 상황을 깨 버리면 나는 어떠한 반응을 하는가? 를 생각해 보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넌 너무 답답하다"라고 반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영에 있는 자들은 이 때 복음을 알게 되는 영역을 한 단계 확장시킵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구약에 매우 중요한 에피소드로 나와 있습니다. '다윗의 범죄'입니다.
다윗이 이웃의 집의 물건(밧세바)를 탐하고, 밧세바를 강간하고, 우리아를 살인하고, 옆의 부하들에게 거짓말하여 하나님께 반역하였죠. 단 한번의 에피소드에서 "이웃사랑"이라는 십계명의 하반절 5계명을 전부 다 어기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셨습니다. 즉, 완벽하게 다윗을 인본주의의 죄악 속에 묶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죄다.' 에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다윗에게 나단이 '복음'을 들고 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복음을 알아듣습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 상관없이 복음이 찾아오면 알아듣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라고 하고 이것은 오직 천국백성만 들을 수 있다고 하여 '천국말씀' 즉, '방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영에 있는 자, 선택받은 자, 예수님의 신부들은 그래서 항상 '회개'를 합니다. 이 때 회개는 살인자가 죄를 반성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내가 일상 속에 살면서 '나의 옛자아'가 나도 모르게 자꾸 인본주의에 묶여 버릴 때 또 다시 성령께서 오셔서 '복음'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알아듣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구분하셔야합니다.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복음이 들릴 때 들을 수 있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것은 사실 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단어가 '회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개'를 '반성'으로 잘못 이해하죠.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일단 안식일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은 이제는 아셨죠? 그렇다면 선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선한 일만 행하신다.” 이 말이 맞는 말입니까?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선한 일이다."가 맞는 말입니다. 즉, 우리는 선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이시죠.
그런데 예수님은 오직 구원을 위해 오신 분입니다. 잃어 버린 양을 찾는 일이 예수님의 유일한 일이기 때문에 오직 복음만이 선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손 마른 자를 낫게 하는 것으로 에피소드를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라고 하신 말의 뜻은 바로 안식일인 예수님께서 선한 일인 복음을 진행하신다는 말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