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즉, 예수님께서 복음의 주인공,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은 오직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시각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신으로 보고 믿는 것은 언듯 보면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여기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것은 나를 위해 신을 만든 것 뿐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탈출하셔야합니다. 우리는 은혜의 대상일 뿐입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성부,성자,성령 그리고 예수님의 지체인 구원받은 자들이 한 몸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천국의 개념입니다. 간혹 우리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죽고싶어! 어서 천국에 가고 싶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천국사상입니다. 천국은 고통없는 행복한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처음 원하신 대로 다시 관계가 회복된 상태를 천국이라고 하죠. 즉, ‘천국에 가고 싶어’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싶어’가 정확한 천국의 개념입니다. (진정으로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은 '이 세상 빨리 끝내고 천국가고 싶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예수님을 알고 싶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죽음으로 영적 세상에 가게 되면 예수님을 완벽하게 알게 되므로 그 시점(죽음)을 빨리 통과하고 싶어하죠.- 많이 다르죠? )
또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라는 뜻은 '예수님의 원함'에 의해서 이미 구원받은 자는 정해져 있고 그들은 이것을 계시를 통해 자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계시란 말씀이며, 특히 말씀의 본질인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태초에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부가 될 ‘사람’을 창조하기를 계획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과 같은 식탁에서 같은 양식을 먹을 수 있는 존재죠. 즉, 본질은 피조물이지만 신분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인 이상한 존재가 바로 ‘사람’인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영적으로 불가능한 메카니즘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또 다른 하나님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하나님)의 몸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바로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의 신분(신부, 지체, 아들로 표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죠.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왜 이렇게 까지 우리와 한 식탁에서 양식을 먹으면서 영생을 누리는 계획(이것을 천국이라고 하죠)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람이 조건을 보고 결혼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 ‘사랑’은 조금 다릅니다. 실제로 ‘왜 사랑하는가?’ 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아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외모? 말투? 노래? 키? 눈빛? 분위기? 한마디로 설명이 안되죠.
예를 들어 '그 사람의 넓은 등'때문에 사랑하게 되었다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미워지면 그 넓은 등이 무척 거슬리게 됩니다. 또 그런 넓은 등을 가진 사람은 매우 많죠. 그때 마다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을 정말 사랑하면 그 사람의 더러운 것, 부족한 것도 좋아 보이죠. 그래서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선택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창조(선택)하신 이유가 ‘그냥 사랑스러워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왜 선택하셨을까?’ 에 대한 대답으로 그냥 '사랑’이라는 단어로 대답하셨지만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에 대한 대답은 정확하게 복음으로 대답해주셨죠. 이 복음을 ‘천지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창1:1-3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그래서 이 말씀은 "태초에 복음을 시작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티끌(땅)이 혼돈(무질서),공허(무가치),흑암(전적타락)의 상태에 있었지만 이 사람에게 빛인 예수님이 사랑(복음)하러 오셨습니다. " 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어차피 멸망시킬 천지를 일부러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를 통해 “내가 너를 저렇게 사랑하고 저런 방법으로 사랑했다.”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설명하고 계획한 것은 ‘복음’이라고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천지창조라는 무대를 통해 “너는 예수님과 같이 있지 않으면 이렇게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삶을 살게 된단다, 너는 예수님를 통하지 않고는 절대 하나님과 같은 식탁에서 같은 양식을 먹을 수가 없단다. 그리고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사랑할 수 있었단다. ” 등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80년 인생이라는 긴 연극무대의 관객임과 동시에 배우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을 알아 듣는자, 곧, 복음을 알아 듣는 자들은 이 배우의 역활에서 벗어나 관객의 눈을 지닌 자들입니다. 그런데 죽는 순간 까지 오직 인생이라는 역활에만 묶여 버린 자.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살기만 애쓰다 죽은 자들 즉, 이 땅에 묶여 버린 채 죽은 자들을 "땅 지 묶일 옥" 지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즉, 연극의 배우로, 인생의 삶으로 힘든 삶만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복음을 알게 되어 예수님의 품에서 관객의 신분(예수님의 지체의 신분)이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평강’을 누릴 것이라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본주의가 주는 편안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인본주의가 주는 욕심이 일시로 채워지거나 두려움이 일시로 해소되면서 느끼는 '편안'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평강은 이 인본주의 자체를 벗어나 있는 ‘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알게 되는 영적평강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확정지어 말씀하시죠. 해석하면, 전에는 내가 인생을 열심히 살아서 평강을 얻으려 했다면 혹은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서 평강을 얻으려 했다면 이제는 그런 구조에서 벗어나 오직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복음을 알아 듣고 ‘관객의 입장’으로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품에서 팝콘 먹으면서 인생을 관찰자로 살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것을 매우 가벼운 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모든 짐은 예수님이 대신 지시기 때문입니다.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복음의 눈을 뜨신 분들은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 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마시고 오직 " 마음이 가난한 자"를 중심으로 전파해 주세요.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복음에 눈을 뜨고 이 글을 묵상하는 분들은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감당하기 어려운 박해를 받게 됩니다.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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