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12:14-21(21.11.03.수)

은혜바라기 2021. 11. 3. 08:4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바리새인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자 예수님은 거기서 떠나갔죠. 당연히 죽을 것이 두려워 떠난 것이 아니시겠죠. 아직 십자가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피하셨다는 말도 어느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그 당시의 상황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라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즉, 인본주의 종교는 늘 예수님과 복음을 박해하고 예수님은 늘 인본주의 종교와 분리되어 계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그 당시 상황을 이용하셔서 지금 성경을 읽는 우리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당시 현재를 사시면서 미래의 우리에게 촛점을 마추고 계신다는 것이죠.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여기서 미래란 시간적 순서에 의한 미래라기 보다는 의미적 순서에 의한 미래입니다. ) 이러한 루틴을 잘 이해하셔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는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것도 이 글을 읽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렇게 병을 고친 것처럼, 귀신를 쫓는 것처럼, 죽은 자를 살린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병을 고치시고 이것을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아직 성령께서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병고침을 목격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더라도 그 믿음은 그냥 종교적인 믿음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무당이 병을 낫게 하면 그 무당을 믿게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을 말합니다. 복음은 이런 수준 낮은 스토리가 아닙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고 하죠. 여기서 ‘길’이란 예수님이 생존하신 그 기간을 짧은 역사의 시간을 말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영광이 항상 드러나 있는 전 역사의 긴 시간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소리’란 바로 ‘복음’입니다. 즉, 인간 스스로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복음을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만약 어떤 사람이든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복음을 알아듣는 자가 생긴다면 그것은 복음의 기초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은 내가 아닌 예수님께서 전부 다 이루셨다는 것이 그 본질적 특성입니다. 즉, 복음을 계획하신 것, 복음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것, 복음을 선포하신 것, 복음을 알아듣게 하신 것, 복음으로 끝까지 견뎌서 이기게 하시는 것 이 모든 것이 전부 예수님께서 홀로 하신 일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우리가 보고 우리가 믿어서 복음을 이해한다면 이것은 복음이 아닌 우리의 노력이 복음과 협력을 하게 되는 꼴이 됩니다. 복음의 파괴가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살아서 사역을 하는 동안은 어느 누구도 복음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 조차도 예수님을 인본주의 종교 및 인본주의 리더로만 인식하게 되죠. 그래서 예수님을 믿었던 모든 자들이 결국 예수님을 비판하고, 박해하고, 죽이고, 배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한갈대와 같이,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철저하게 망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도 그렇게 행한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완성하셔야하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먹먹하시죠? 

 그래서 오늘의 마지막 말씀은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로 표현된 것입니다. 여기서 ‘이방’의 의미는 좁게는 이스라엘 외의 모든 민족을 가리키지만 본질적으로는 ‘ 성경 속 이 아닌 성경 밖에서 성경을 보고 있는 자’ 혹은 ‘인본주의 기독교 안이 아닌 그 밖에서 기독교 복음을 보고 있는 자’ ‘인생을 사는 자가 아닌 인생 밖에서 인생 속의 복음을 보고 있는 자’를 말합니다. 이방인이라는 개념은 너무 영적인 개념이라 완벽하게 뜻을 전달해 드리지 못하지만 복음의 진영에 있는 분들은 이해했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복음에 눈을 뜨면 이 땅에서 '내가 이방인'임을 저절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외롭다'가 아닌 '평강'을 알게 되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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