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어제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인본주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인본주의는 선악과를 먹은 이후 나타난 선악구조 전체를 말하는 것이므로 인본주의 자체가 '죄'의 본질입니다.
주님은 천지창조(역사와 인생)를 통하여 복음을 설명하려는데 인간은 그것에서 벗어나 인간들의 바벨탑을 쌓죠. 이 바벨탑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인본주의를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할 때 그 도둑은 정말 '악'은 아니죠. 그냥 역활입니다. 그러나 이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하기 위해 집에서 가출해서 부모를 버리고 그 놀이에만 집중하게되면 그것은 '악'이라고 하죠. 이 땅의 삶은 그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설계하신 역사와 인생를 복음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직 인간의 삶으로만 해석하는 인본주의를 성경은 '악'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와 인생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의 필요성'을 계속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럼에도 인간은 인본주의 행위로 구원을 잡으려하고 있죠. 그리고 '신앙 생활의 열심'을 믿음이라고 착각하죠. 이것을 '인본주의 종교'라고 합니다. '참 기독교'는 여기에서 벗어나 나의 먼지됨을 자각하고 나의 죄를 덮어주신 예수님을 자각(믿음)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 옆집남자를 사랑하면 인본주의에서는 '죄 혹은 악' 이라고 하죠. 반대로 남편만을 사랑하는 여자를 휼륭한 아내라고 하죠. 이것을 인본주의에서는 선이라고 합니다. 이런 시스템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 선과 악이 아닙니다. 진짜 죄와 악이란 우리가 신랑 예수님을 버리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 땅에 허락한 것이 앞서 말한 인본주의 선과 악입니다. 눈을 뜬다는 개념은 이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이 세상의 표적을 보여주기 바라죠. 이것을 음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복음'을 말합니다. 요나서가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복음'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나서에서 가리키는 큰 물고기 뱃 속에서의 3일, 즉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로 들죠.
또한 예수님은 요나의 복음을 듣고 이방의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것, 솔로몬의 복음을 듣고 싶어서 먼 남방 여왕이 오게 된 것을 통해 오직 '복음'의 중요성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복음의 주인공이 바로 눈앞에 서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옆집 남자(이 세상의 표적)"을 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바라새인이 바로 우리입니다. 이 세상 교회는 예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수단으로 '잘살기'를 요구하는 것이죠. 그러나 복음이 들리는 자는 반대로 '인생 잘살기'라는 것이 얼마나 '광야'같은지 알죠. 즉, 먼지 같다는 것, 무가치하다는 것, 무의미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 동안 인생에서 마음 속에 쌓아 오던 모든 것이 무가치해지죠. 그래서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그래서 복(복음)을 받게 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전부 말씀으로 지으셨는데, 오직 사람만 흙으로 지으신 이유를 잘 아셔야합니다. '흙'은 '티끌'을 뜻합니다. 즉, 흙이란 흙의 원소 혹은 작은 단위의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없음(nothing)'을 말합니다. 즉 사람의 본질은 이 세상에 '없음' 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불어 넣어 주신 생기, 즉 생령, 즉 성령이 바로 그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몸체를 '없음(nothing)'으로 만드신 것이죠.
이것을 알게 된 자들 즉,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복있는 자들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 됩니다. 즉, 성령께서 복음을 알게 하시어 예수님의 지체가 된 자들을 말하죠. 이들을 거듭난 자라고 하죠. 진짜로 천국을 위해 태어난 자라는 뜻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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