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13:24-30(21.11.15.월)

은혜바라기 2021. 11. 15. 09:1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천국은 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천국을 가장 가깝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관계'입니다.  천국은 관계의 개념입니다. 즉, '예수님과 교회(선택받은 나)'의 관계를 말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죠. 이것을 장소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서 예수님이 저 구름 넘어 어딘가에 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좋은 장소를 만들겠다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님이 선택된 자들을 모으신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성경을 읽고 복음을 알아 듣게 되어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오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시는 중(ing)인 것이죠.  오늘 말씀을 보죠.
 
  좋은 씨는 '말씀의 예수님'이죠. 제 밭은 '인자 예수님'입니다. 씨 뿌린 사람은 '하나님' 입니다. 전부 예수님(하나님) 중심의 이야기입니다.  특히 우리는 인자 예수님에 대하여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인자 예수님의 정체는 '나'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즉,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나로 오셔서 율법을 다 지키시고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속죄의 사역을 하신 것이죠. 즉, 나를 가슴에 품고 다니신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잘 때에'라는 표현은 '인본주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더 직접적으로 해석드리면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중에'라는 뜻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선악과 사건 이후 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시간을 뜻합니다. 이 때에 원수가 가라지를 뿌렸다고 되어 있죠. 여기서 나온 원수는 촛점이 아니므로 그냥 넘기셔도 됩니다. 이 글의 촛점은 곡식과 가라지가 같이 자랄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추수의 때 까지 곡식과 가라지를 함께 놔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죠. 
 
   
 곡식은 이미 앞서 해석을 해드렸죠. 즉, 인자 예수님의 품 안에 있는 복음을 알게 된 예수님의 지체들입니다. 가라지는 유기된 자(버림받은 자, 혹은 죄, 혹은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되어 가라지를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이 세상에 지진, 홍수등의 심판성 재난을 주어서 그 중에 선택받지 않은 자들을 몰살해 버릴 수 있는데 그러다가 혹시라도 선택된 자들까지 죽는것이 염려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시면 완전히 방향성을 잃어버린 해석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신다고 해도 정확하게 가라지와 곡식을 구분할 수 있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선택된 자들이 이런 심판으로 육체의 죽음을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천국에 가게 되겠죠. 즉, 이런류의 해석법은 전부 인본주의식 사고방식에서 나오기 때문에 항상 모순이 생겨버립니다. 

 

 오늘의 이 말씀에서 가라지의 정확한 정체는 바로 나의 옛자아입니다. 또한 그것을 객관화 시켜서 보여주는 유기된 자들 혹은 인본주의로 봐도 됩니다. 오늘 조금 어렵죠? 

 

 만약 이 인본주의 세상에서 모든 '죄'를 다 뽑아 버리시면 곡식된 자는 '죄'라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죄를 통하여 진짜 죄의 실체를 알게 하려는 하나님의 진짜 의도"를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실체를 알리기 위해 상징을 주셨는데 그 상징을 제거해 버리면 실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본주의 세상을 진지하게 살아내야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아가야하는 것이죠. 

 

 어려우니 조금 더 쉽게 예를 들어드릴께요. 교회에서 봉사와 헌금을 합니다. 그것을 통해 선택받은 자들은 ' 나는 절대 봉사와 헌금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구나! ' 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러면서 '하나님께 봉사를 하고 하나님께 무엇인가(십자가)를 드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였구나!' 라는 것으로 방향성을 갖게 되죠. 그런데 가라지는 이런 봉사와 헌금을 통해 자아실현을 합니다. 즉, '내가 이정도 가치는 있구나, 내가 이정도 가치있는 일은 하는구나~~'에 묶여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즉, 곡식과 가라지가 나누어지는 것이죠. 

 

 이제는 조금 아셨죠? 왜 곡식이 가라지와 함께 있어야만 곡식이 죄를 인식하고 복음을 알게 되어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 가는지, 또한 결국 가라지와 곡식이 어떻게 나누어져서 심판을 당하는지를 잘 아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알기 위해서는 필히 인본주의(선악과)라는 수단을 겪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필히 선악과를 따 먹어야 합니다. 이상한 논리라고 생각을 하시겠지만 선악과를 먹어야 복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간은 한정되어 있다고 하시죠. 심판이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인본주의와 복음을 영원히 분리시킬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죠. 이렇게  분리되는 시점은 우리의 육체가 죽은 이후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인생이 정확하게 심판의 시점입니다. 80년의 기회를 버리지 마세요. 

 

 (( 복음을 조금 깊에 아시는 분들만 이 괄호의 내용을 읽으세요. 심판에 대한 묵상을 조금 합니다 .심판의 실체는 이 인류의 마지막 날을 뜻하는 것 보다 개인의 종말이 더 실체에 가까운 것입니다. 즉, 각각의 개인은 하나의 우주입니다. 즉, 개인의 인생 80년이 정확하게 요한계시록입니다. 그 기회의 시간 동안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겪게 되죠. 그 기간 동안 칭찬받는 일곱교회도 되었다가, 야단맞는 일곱교회도 되었다가 7대접, 7인, 7나팔의 인생의 고난을 겪죠. 그러나 내가 이겨내는 줄 알았던 고난을 나 대신 예수님이 다 치루셨다는 것을 알게 된 자들(예수님께 면류관을 벗어 드리는 24장로와 같은)과 끝끝내 '내가 할꺼야, 이 땅에서 잘살꺼야'에 묶여 버리는 가라지(사탄과 함께 이 땅의 무저갱에 묶여 버린 자들)로 심판받게 되어 인생을 사는 동안 이 둘로 분리가 되죠. 이 상태로 어느 순간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죽음은 이미 분리된 것을 확정짓는 도장같은 역활 뿐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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