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오늘 말씀에서 등장한 누룩은 예수님입니다. 여자는 교회를 뜻하며, 가루 서말에서 '서말(3)'의 3은 성부성자성령 3위의 숫자. 즉, 하늘의 숫자, 즉 복음의 숫자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교회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여 복음에 대한 것을 선포하여 교회에 복음이 풍성해 지는 것을 천국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촛점은 누룩으로 인하여 가루 서말 전부가 부풀게 된다는 것이 천국이라는 것이죠. 즉 예수님의 영향력으로 여자인 교회 전체가 은혜로 덮힌다는 것입니다. 복된 소식(복음)이죠. 즉,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죠. 그 때의 누룩은 말씀을 복음으로 해석하지 않고 인본주의 방식으로 해석하거나 규칙을 만들어서 오염시키는 것을 뜻하죠. 재미있게도 그 때 사용했던 '누룩'이라는 단어를 오늘은 예수님을 지칭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결국 이 세상 모든 것은 복음을 해석하기 위한 그림자인데 이 그림자는 '절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늘 상대적이죠. 그래서 복음의 눈이 없는 자 즉, 소경은 절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뿐 아니라 인생과 역사도 복음으로 해석하지 못하죠. 그냥 그림자놀이만 하다가 죽는 인생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많이 나오는 대부분의 누룩은 "자기 의" 로 해석됩니다. 즉, 자기 성실, 자기 열심, 자기 헌신 등입니다. 이것들은 복음에 해가 됩니다. 특히 신앙생활속에 '자기 의'가 들어가게 되면 모든 신앙생활은 복음에서 벗어나 '종교'가 되어 버리지요. 바리새인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이 바라새인의 시대에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지금 내가 바리새인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우리는 살인자, 간음자, 비도덕정치인을 욕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인을 보고 욕을 하는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렇다면 죄 지은 사람을 칭찬해야하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 죄 지은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니 객관화된 나(죄짓는 타인)를 보여주시는 것이죠.
올바른 삶(괜찮은 기독교인)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 문장 자체가 모순입니다. 이 인본주의 구조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인본주의 안에 선과 악으로 구분하여 이것들을 경험하게 한 것인데 이 인본주의 선을 노력하고, 인본주의 악을 비판하는 것에만 묶여 있는 것은 바로 정확하게 '진짜 악'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단 한가지. 오직 예수님으로 덮는 것. 이 복음만이 인본주의 구조인 참악에서 벗어나서 구원을 이룰 수가 있죠.
이 천국에 관하여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이 다 드러난다고 하시죠.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런데 비유로 하신 다고 하죠. 이유가 뭘까요? 선택받은 자만 알게 하려 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기된 자들이 알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유기된자들이 복음을 아는 것이 두렵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복음을 알아간다고 하죠. 그러나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먼저 우리는 눈을 떠야, 즉 거듭나야 진짜 성경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즉, 진짜 성경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 안에 진짜 하나님의 속 뜻을 일부러 숨겨 놓으셨다고 했는데 그것을 우리의 노력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을 뜬 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신부로 이미 태초에 정해 놓으셨다고 하죠.
제가 이렇게 묵상을 매일 포스팅하는 이유도 누군가를 설득하여 복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 묵상을 쓰면서 더 깨닫게 됩니다. 이 묵상의 역활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신부를 찾으시는 통로로 사용되는 것 뿐이죠. 혹시 복음이 들리신다면 너무나 감사한 일이고 혹시 그렇지 않으시다면 '기도하세요' 기도는 '항복'입니다. 즉,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세요.
성경은 어디에도 무엇을 달라는 기도를 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본주의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도는 두손드는 '항복'의 행위 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주겠다는 그 '무엇'은 오직 딱 하나 '성령'뿐입니다. 정확하게는 성령을 통해 복음을 알게 하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하나님이 주겠다는 것은 오직 '성령'뿐인데, 사람은 이 세상의 것을 늘 구하죠. 그런데 더 신기하게도 복음이 들리는 순간 부터 오직 기도가 '성령 충만' 즉, '복음을 알고 싶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복음이 들리게 되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바울이 말한대로 '똥(배설물)'이 됩니다. '똥'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은 없죠. 간혹 복음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아직도 이 똥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죠. 그 사람은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눈을 못 뜬 채 '빨간색'의 설명만 듣고 있는 자인 것이죠. 눈을 뜨고 이 '빨간색'을 보게 되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