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주님께서 말씀과 표적을 행하신 후에는 꼭 '그 곳에서 떠나서' 라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중요하다는 말이죠. 이 뜻은 뭘까요? 주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적, 이적을 사용하시죠. 그런데 사람은 그 본질인 복음을 믿기 보다는 그 기적과 결과를 기대하고 '잘살기'를 쫓죠. 이것을 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글을 읽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사들이 대부분 여기서 자유롭지가 않죠. 아니 불가능하죠. 이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예수님께 의지하는 목사가 있다면 형제라 부를만 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할 수 있다고 한다거나. 예수님이 나를 변화시켜 내가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경우는 누룩이 있는 자이니 조심해야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라는 말은 '성전안에서' 즉, 천국안에서만 복음이 존재하고 흘러나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씀을 인본주의의 관점에서만 바라봅니다. 인본주의능력, 인본주의신분, 인본주의관계, 인본주의인과율을 따르죠.
결국 예수님은 말씀 속에 있는 복음을 말하지만 이들은 말씀을 행위로 바꾸어서 복음을 듣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방언'이라고 합니다. 방언이란 그 지역에 속한 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라는 뜻입니다. 이 방언을 뚜렷하게 상징으로 설명한 곳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가의 다락방이었죠.
랄랄라 기초반언, 케라케라 고급방언 등등 헛소리들 해대는 자들을 조심하세요. 주님이 직접 주시는 신비한 언어로써의 방언은 단언컨데 없습니다. 방언이란 오직 '복음'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한시적으로 등장한 도구일 뿐입니다. 복음이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시 성령께서 '불의 혀''모양으로 연출까지 하시죠. 이후 서신서에서 바울이 방언을 경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바울도 방언에 관하여 헤깔리게 성경에 써놔서 '봐라 바울도 방언을 인정하는 부분이 있자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그 당시 복음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나타났던 '방언 '까지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일 뿐 입니다.
그러면 현대에 진짜 '이상한 방언'을 하는 자들은 뭐냐? 이 이상한 말은 기독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에 다 있습니다. 심지어 아프리카 토속신앙에도 존재하죠. 더구나 기독교에서 하는 방언의 형태와 타종교에서 하는 방언의 형태를 녹음해서 들으면 거의 비슷합니다. 어떤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이것을 천국의 방언, 마귀의 방언으로 나누죠. 기독교 밖에서도 방언을 하고 있는 모순이 일어나니 그것을 이런식으로 해결하여 모순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이상한 방언을 하게 될까요? 하나님은 동물과는 다르게 인간에게 '말하는 재능'을 매우 강하게 부여하셨습니다. 심지어 사람은 훈련을 하면 5개국어, 7개국어를 할 수 있을 정도죠. 심지어 게그맨들은 전혀 배우지 않았는데 가짜 중국어, 가짜 프랑스어, 가짜 외계인어까지 곧장 즉흥적으로 지어서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강한 집중을 하면서 말을 빨리 하거나 많이 하다보면 우리의 '말 재능'은 언제든지 외부로 흘러 나올 수 있습니다. 혹은 옆의 사람의 이상한 방언을 따라서 훈련을 하거나 혹은 스스로 훈련을 하면서 이상한 말에 더 많은 살을 붙여 나갈 수도 있죠. 즉, 방언을 한다? 못한다? 의 차이는 그냥 그 사람의 '말 재능'의 차이일 뿐이고, 그 조차도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중언부언'일 뿐입니다. 절대 하지마세요. 주기도문을 복음으로 해석하시고 그것을 삶에 비추어서 조용히, 하루종일 되새기며 묵상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기도입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를 조금 쉽게 해석하면 '선지자는 자기 집에서는 박해를 받고 타향에서는 존경받는다'입니다. 말씀의 본질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나는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은혜만 바란다.(하나님의 은혜=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 말씀을 행위(규칙)로 해석하여 지켜낼 것이다.'로 바꾸어 버렸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말씀안에 들어 있는 진짜 핵심인 복음을 버린 자가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선지자(말씀=복음 맡은 자)를 박해했다"라고 표현한 것이죠. 그러나 '선지가가 타향에서는 존경 받는다'라는 말은 신약에 와서는 타향의 대표자인 죄인들이 선지자의 실체인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좀 길지만 포로이야기를 해보죠. 구약에서 포로이야기는 뺄 수 없는 거대한 사건입니다. 구약에서 매우 강하게 거론되는 사건은 복음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오늘은 이 중에서 '포로'이야기를 해보죠.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포로생활을 시키셨을까? 포로란 점령국에 갖혀있는 자를 말합니다. 포로란 결코 점령국민이 될 수가 없죠. 포로는 그것에서 풀려나는 것만이 희망인 사람이죠.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에서 묶여서 살고 있는 선택된 자들의 모습을 설명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리는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포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그것과 분리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분명히 알아두세요. 하나님께서는 인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설명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셈플로 선택하여 그 고생을 시킨 것입니다 우리가 100%선택받은 자라면 인본주의(이 세상)에서 우리는 잘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밖에 없는 자들은 점령국에 속한 자들이에요. 인본주의에 속한 자들은 열심과 성실함으로 가치를 획득하며 잘살아 가죠. 그들이 점령국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포로들은 결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본보기'가 예수님입니다. 이상하게도 선택받은 자는 아무리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도 '인본주의 가치를 계속 잃게되는 자'로 남게 되요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성령을 받은 자는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자들이죠. 그것은 예수님이 그 자의 인생을 핸들링 하신다는 것입니다. 조금 비약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나를 안으시고 두번째 사신다는 것입니다.(이것은 내가 2천년전에 예수님의 품에서 이미 살고, 죽었다라는 것과 완벽하게 같은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의 의미적 순서가 완벽하게 동일하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 분은 정말 축복받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나를 품에 안으시고 두번째로 사시는 예수님이 잘 사실까요? 폼나게 사실까요?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직장, 좋은 가족을 꿈꾸며 사실까요? 절대 안그렇죠. 우리의 삶의 목표은 포로해방에 있습니다. 이 인본주의의 경계가 정확하게 '어린양의 피'입니다. 즉, 인본주의에서 벗어나서 한참 더 노력하여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정확하게 예수님의 품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인본주의를 벗어 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예수님의 품입니다. 즉, 내 뺨에서 예수님을 느끼는 순간만이 정확하게 인본주의를 벗어난 순간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