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14:1-13(21.11.25.목)

은혜바라기 2021. 11. 25. 09:27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갑자기 왜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나올까요? 이것도 복음을 설명할 수 있는 도구로써의 '에피소드'라고 판단하신 하나님의 뜻이겠죠. 성경은 항상 이런식으로 복음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것이 필수입니다. 첫번째 의미는 '요한은 죽어야 한다.' 입니다. 즉, 예수님을 가리키는 구약의 마지막 손가락인 요한은 실체인 예수님이 오셨으므로 이제는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태양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시면 안됩니다. 태양을 봐야합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인 두번째 의미가 있습니다. 이 글은 의미적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즉, 요한이 죽게 된 이유와 배경이 가운데 설명이 되어 있고 그 앞에서 '예수를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믿는 헤롯'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뒤에서는 '예수님이 배를 타고 떠나사'의 문장입니다. 이 두 문장부터 해석을 한 후에 그것의 색깔을 가지고 가운데 문장을 해석을 해야 오늘의 말씀 전체가 이해가 됩니다. 미리 말하지만 조금 어렵습니다. 

 '예수님는 요한이 부활한 것'이 아니죠. 그런데 그렇게 착각하고 믿고 있죠. 즉, 예수님의 정체를 오해를 하고 있긴 한데 그 분을 부활한 신의 반열에 두고 있습니다. 즉, 복음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우상의 일종으로 믿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샌드위치 구조인 '예수님이 배를 타고 떠나사'라고 되어 있는 부분은 완벽하게 그 상황이 인본주의 종교의 상황임을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그래서 분리, 즉 '떠나사'라고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이죠.

 

 그렇다면 샌드위치의 구조 중 가운데 위치해 있는 핵심 에피소드를 살표보죠. 일단 어떤 색깔의 안경을 쓰고 봐야할찌 아시겠죠? 정확하게 '인본주의 종교인'에 대한 고발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요한의 부활'로 믿는, 즉 어떤 알지 못하는 신으로 믿는, 즉 참 복음을 모르고 그냥 "교회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신이라고 누가 알려 줘서 그럭 저럭 그렇게 의식하면서 우상의 단에 모셔놓고 나름 정성껏 모시면서 나의 바람을 이루어 달라고, 아니면 그만이고....."의 상태를 고발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핵심 에피소드'를 보시기 바랍니다. 

 

 헤롯은 '나'입니다. 요한은 '율법'입니다. 나(헤롯)에게 율법이 선, 악을 말하지만 헤롯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죠.(동생의 처를 빼앗는 것으로 표현) 그래서 도리어 요한을 죽이려 하지만 이 세상의 가치판단의 잣대가 두려워서 죽이지 못합니다. 조금 쉽게 예로 설명드리면, 우리는 땅에 떨어진 돈을 살짝 훔쳐가고 싶죠. 그런데 그러다가 발각되면 손가락질 당할 것이 두려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사실은 아까울 때가 있지만 남들의 시선 때문에 하게 될 때가 있죠. 그 '남'에는 '내 옛자아의 시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그래도 신앙이 좋은 사람인데..."라는 교만의 안경을 쓰고 있는 나의 옛자아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율법을 실제로는 지키지 못하면서 다른 이유(두려움) 때문에 지키는 것 처럼 '그런 척 하며 살다가(외식)' 어떤 계기가 오면, 즉 주위 모두가 '그래 그래 그래도 돼~~'라는 인본주의 합의라는 계기가 마련되면 즉각 율법을 죽여 버리는 본성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확하게 인본주의 혹은 인본주의 종교의 특성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복음의 눈을 가진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흐름을 가장 두려워하죠. 그 흐름은 어떤 계기, 즉 목사가 바뀌고, 프로그램이 바뀌고, 교회규칙이 바뀌면 "그래 바로 이거지~~!!!"하며 신앙의 색깔을 바꾸는데 어려워 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오늘의 에피소드에서 "의붓딸이 춤을 잘 추고 그것의 댓가로 사람의 목숨을 요구하니 '왕은 자기가 한 말을 꼭 지켜야 한다' 라는, 웃기지도 않은 명제를 대입시켜서 율법을 죽여버리는 장면 " 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블랙 코미디를 보는 것 같죠.  조금 어렵죠? 

 

 우리의 본질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두려워합니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이것이 교회 생활의 척도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이 묵상을 잘 이해하셔야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눈을 살피지말고 오직 예수님의 눈만 살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그러지 못합니다.

 즉, 내가 얼마나 교회의 질서와 교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존재인가를 더 깊이, 더 넓게 깨달아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 핵심입니다 즉, 내가 이 "교인 눈치보기"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매일 매일 깨달아서 "그래서 예수님이 나 대신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수 밖에 없구나"의 "앎"이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래 다 그렇게 눈치볼 수 밖에 없지 뭐~~" 이런 방향성은 또 다른 "자기 합리화" 즉, "내가 편히 잘살기의 또 다른 한 방법"으로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아닙니다. 오직 "나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오직 "예수님 밖에 없구나" 의 처소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샌드위치의 구조의 마지막처럼 예수님은 그곳에서 배를 타시고 떠나가십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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