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14:14-21(21.11.26.금)

은혜바라기 2021. 11. 26. 09:0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병자를 고쳐 줌' 이글은 완벽하게 복음을 설명하고 있죠. 현대교회는 신자들이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죠. 간절함으로, 열심으로, 정성으로,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  '예수께서 나오사'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무조건적 선택'이라고 합니다. '불쌍히 여기사' 라는 것은 우리가 가진 조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 곧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병자를 고쳐 줌' 즉, 인본주의라는 병(죄)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것이죠. 여기서 병자는 '전적타락한 존재'의 역활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큰 무리' 전부가 아니라 '그 중'이라고 표현하죠. 즉,'예정된 자'들입니다. 이것을 '제한속죄'라고 합니다. 구원받을 자들은 이미 태초에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3가지에 불가항력적 은혜와 성도의 견인 두 가지를 더해서 장로교 5대 교리라고 합니다. 항상 이 5가지 교리의 안경을 쓰시고 성경을 해석하는 습관을 가지셔야 합니다. 불가항력적 은혜란 하나님이 구원(은혜)를 주시려고 할 때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며, 성도의 견인은 모든 성도의 구원의 과정을 오직 성령께서 성도를 견인하여 이끌어 간다는 말입니다. 

 

 이 장로교 5대 교리는 '장로교이기 때문에 선택한 교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 초대 기독교부터 계속 해 왔던 '복음 지키기'의 일환입니다. 복음으로 기독교가 탄생 했지만 인간이 '교회'라는 '눈에 보이는 건물과 사람 공동체'를 만들면서 그 안에 계속해서 '인간의 노력'이 첨가 되었죠. 이것을 진정한 신앙인들이 초대 기독교 부터 계속 막아 왔습니다. 성경의 서신서들이 이 부분을 가장 많이 다루죠. 이것을 누룩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도, 중세에도, 현대에도 이 부분은 교회에 넘쳐남니다. 그것이 교회의 99%를 잠식한 시대가 바로 종교개혁의 시대였죠. 그 때 다시 초대 교회 때 부터 지켜왔던 복음의 기준선을 다시 한번 되새긴 것이 이 5대 교리입니다. 즉, 정확하게는 칼빈이 만든 것이 아니라 칼빈과 몇몇의 진정한 복음의 눈을 가진 자들이 초대 교회 때 부터 있어 왔던 복음의 기준을 다시 꺼내서 5가지로 정리 한 것 뿐입니다. 

 

 이 복음과 가장 대립선에 서 있는 사상이 알미니안리즘 입니다. 즉, 하나님이 구원을 하기 위해 손을 내밀면 인간이 그 손을 잡아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 사상에 전부 다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복음을 알아 듣는 자'가 되는 첫 시점이 바로 이 말이 '엉터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재미있지 않나요? 복음을 위협하는 가장 큰 명제가 오히려 복음을 알게 되는 가장 큰 명제라는 것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나? 에서 내가 무엇도 할 수 없구나~~!! 를 알게 되는 시점을 꼭 기억하세요. 그 시점이 분리의 시작이고 어린 양의 피만 의지하여 문 뒤로 숨게 되는 시점입니다. 그것을 모르면 팔 걷어 붙이고 문 밖으로 나가서 '무엇을' 하려고 하죠. 그러나 문 밖의 모든 '장자'는 다 죽습니다. )

 

 그 다음은 그 유명한 5병2어의 사건입니다. 시작을 '저녁이 되매'로 시작하는 것은 결국 말씀이 보이지 않게 되면 제자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가? 라는 복선입니다. 제자들이 결국 ' 배고파요' 라는 육신의 부족함을 자꾸 이야기하게되죠. 그리고 본인들의 기준으로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예수님께 요구하기까지 하죠. 현대기독교가 이렇습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예수님께 기도하여 그것을 이루려는 방식으로 종교생활을 하게 되죠. (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도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합당하면, 단언컨데 100% 모든 기도는 전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대부분의 기도가 여기에서 다 벗어나 있죠. 예수님은 오직 구원에 대한 기도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복음을 아는 자만이 제대로된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
 
 그런데 이렇게 인본주의 어두움에 갖혀 있는 제자들의 행동을 이용해서 예수님은 복음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죠. 당연히 여기서 먹을 것은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제부터 너희에게 어떤 것을 줄 것인데, 이것은 인본주의(진짜 먹을 것,  혹은 신비주의 )에 대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이야기란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물고기 5마리와 떡2개는 복음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물고기 5마리는 '모세5경', 즉, 말씀을 이야기 합니다. 떡2개는 말씀의 두 가지 큰 정의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가지 계명이 모든 율법이다'라고 예수께서 말하셨죠. 그래서 다시 반복하면  5병2어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그 말씀의 본질인 복음을 뜻합니다.   
 
 왜 '12광주리'일가요? 12라는 숫자는 '교회' 즉, 선택된 자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의 지체이자 신부를 말하죠. 이 12라는 숫자는 3이라는 하나님의 숫자와 4라는 땅의 숫자가 곱하여진 숫자입니다. 즉 하늘의 복음을 땅에서 받은 자들의 곱(모임)이라는 뜻이죠. 이것은 성경 전반에 계속 나오죠. 12지파, 12제자, 144,000명(12*12*1000), 방주를 4각형으로 3층으로 만든 것(4*3), 인생의 나이를 120살(12.*10. 교인(복음을 아는 자)으로 살아야한다.)로 제한하신 것. 등등 성경의 모든 12라는 숫자는 전부 교회, 즉 천국 시민을 가리킵니다. 남은 음식이 12광주리라는 것은 이 에피소드가 바로 교회에게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정리해보면 오병이어의 에피소드는 매우 단순한 복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먹이시기 위해 오셨다."가 전부 입니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기적'을 사용했기에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나도 기도해서 기적을 만들어서 잘 살아보자'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기적'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신 이유도 정확하게는 "죄인들은 모두 심판 받아야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 일부는 십자가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인데 이것은 기적과 같은 것, 즉 인간 세상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제 왜 예수님이 사역 중에 기적을 행하셨는지 아셨죠? 우리의 구원 자체가 '기적'의 속성을 포함하고 있기에 이것을 읽는 우리에게 '구원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일 뿐입니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도깨비 방망이'로 풀어서 사용하죠. 특히 새벽에 많이 사용하죠(ㅋㅋㅋ  )


 왜 어린이와 여자를 카운터에서 제외했을까요? 이것도 목사들은 이스라엘민족이 얼마나 남성중심적인 사회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만 설명합니다. 이정도로 한국기독교는 복음에서 철저하게 제외되어 있습니다. 흡사 말라기를 보는 것 같죠. 물론 역사적으로 이런 설명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을 통하여 복음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을 듣는 자들은 전부 소경이 됩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가부장적인 문화를 설명하지기 위해 성경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으시다고요? 어이가 없죠. 성경의 한 획은 우주보다 위대합니다. 어린이는 누가 필요하죠? 부모입니다. 여자는 누가 필요하죠? 신랑입니다. 이제 눈치 채셨죠?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며, "신랑"입니다. 곧 어린이와 여자는 그 부모와 남편에 속한 자 이므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즉 성경은 남편이자 부모인 예수께서 빵을 드시면 그 분의 자녀이자 신부인 우리도 그 빵을 먹은 존재로 인정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복음의 눈을 뜨신 분들은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 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마시고  오직 " 마음이 가난한 자"를 중심으로 전파해 주세요.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복음에 눈을 뜨고 이 글을 묵상하는 분들은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감당하기 어려운 박해를 받게 됩니다.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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