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는 인본주의 탈출을 뜻하죠. 그러면 '행복'해야 하는데 고난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인본주의)를 떠나자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광야'가 찾아왔죠. 이 고난(광야)이 시작이 되어야 우리는 에수님을 찾게 되죠. 그래서 '고난이 오니' 다음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 위를 걸어서'라는 문장이 들어가 있죠. 이것은 역사를 발로 밟으시는 자, 곧 역사의 주관자임을 뜻합니다. 위의 물결도 이 바다와 같은 의미죠.
성경에서 나오는 '물'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복잡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은 생명을 뜻하기도 하지만, 죽음(심판)을 뜻하기도 합니다. 물은 무엇을 깨끗하게 하는데도 쓰이죠. 우리의 몸에 벌레가 묻었다고 치죠. 그것을 물로 씻는다면 우리의 입장에서는 깨끗하게 되는 것이지만 벌레의 입장은 죽음을 뜻하겠죠. 생명은 예수님, 죽음은 심판, 깨끗하게 되는 것은 분리를 뜻하겠죠. 이렇게 물은 복음을 매우 잘 설명하기 때문에 성경에 '물, 바다, 강'은 자주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구원하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하는 물은 정확하게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물 세례를 받는 것은 인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죽는 것' 이고, 복음의 진영의 입장에서 보면 '살아서 나옴, 거듭남'입니다. 인본주의에서 분리되어 예수님의 지체가 되는 것을 뜻하죠.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다 담겨져 있는 것이 '역사' 입니다. 그래서 결국 역사는 큰 물인 바다로 표현이 되죠. 그러한 큰 물인 역사 속에서 '죽는 자'와 '사는 자'를 갈라내죠.
노아의 방주를 하늘로 띄운 바다는 생명이지만, 그 아래 수장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심판이죠. 이것은 성령의 일하심과 동일하죠.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매우 간단하게 성경에서 정의한 말씀이 있죠.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하여 ' 가르치시는 일하시죠. 이 말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의,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 죄. 이 둘을 분리시키는 것이 심판임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분리는 곧 천국이기도 합니다. 복음의 핵심을 알면 성경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를 가리키죠.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인본주의에 묶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인본주의를 벗어나지 않는 한 예수님을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알 수 없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죠. 우리가 노년의 미래를 알 수가 없어서 두려워 하듯이 말이죠. 그래서 제자들이 무서워하여 소리를 지르게 되죠. 그러자 예수님이 '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시죠. 이것을 평강이라고 합니다.
잘 생각해야합니다. 내가 인본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서 예수님을 붙잡아 평강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인본주의에서 먼지임을 알게 되고 무너져 버릴때 나를 붙잡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붙잡고 있단다'라고 알려주시는 것을 '평강'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매우 간단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오직 복음, 즉 예수님 뿐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두꺼운 이유는 우리가 그 예수님을 너무 멀리 떠나서 전혀 다른 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길이라고 믿고 있는 그 많고 다양한 잘못된 길을 성경은 하나 하나 전부 다 잘못된 길이라고 알려주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이 두꺼운 것이죠. 진짜 참길은 매우 매우 단순합니다. 즉, 복음은 단 한 줄로도 표현이 가능하죠. 심지어 "오직 예수님"이라는 간단한 두 단어로 성경 66권을 전부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성경이 두꺼운 그 자체가 "우리가 얼마나 인본주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가~~~!!!"를 가리키는 증거가 됩니다. 즉, '나를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얼마나 불가능한가! 를 가리키는 것이죠. 그래서 성령께서 택한 자들만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불교의 법정 스님이 인용했던 '무소유'의 개념도 이것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한번 잠깐 살펴보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석가시여, 저는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큰 번뇌의 흐름을 건널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의지해 건널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널리 보는 분이시여."(숫타니파타 1069절) 거룩한 스승은 대답하셨다. "우파시바여, 무소유에 의지하면서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생각으로써 번뇌의 흐름을 건너라. 모든 욕망을 버리고 의혹에서 벗어나 집착의 소멸을 밤낮으로 살피라."(1070절)
너무 재미있지 않나요?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읽다 보면 고민하는 내용을 불교에서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 뿐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에 다 있죠. 정확하게는 인간의 삶에 전부 다 녹아 있도록 하나님께서 설계하셨죠. 그런데 그 해결책만 전부 다를 뿐입니다. 불교는 '스스로 욕망을 버리고(무소유) 살펴라'는 것을 노력하라는 것으로 끝내죠.
불교에서 말한 것 처럼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즉, 사람은 이 땅의 무가치함을 누구나 발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설계하셨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서 더 좋은 가치를 찾자 그래서 다시 쌓아보자(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쌓는 것이 좋아 보여서 그것을 따라하게 되죠)"로 해결책을 내어 놓죠. 불교는 "무소유의 개념을 노력하자"로 해결책을 내어 놓죠. 사실은 전부 다 같은 것입니다. 불교가 조금 더 결과에 대한 인식판단이 좋은 것 뿐이죠.
그러나 이것에 대한 정답은 "없다."입니다. 인간은 절대 스스로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나를 품어 주시는 것이 "답"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는 예수님의 긍휼을 바라는 것 뿐이죠. 이것을 매우 잘 보여준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지막 대인 사역인 십자가 옆 강도 에피소드입니다. 그 자는 평생 죄만 짓다가 그냥 처형당한 삶만 살았는데 말 한마디로 '천국을 가게 된 자'로 예수님이 유일하게 직접 선언한 인물이 됩니다. 그 자의 말 한마디를 살펴보죠.
"예수여 당신의 나라로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자기가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기억(긍휼,기준)"에 의존한다는 것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길만이 '참길'입니다. 이 '참길'에서 인간은 신기하게도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죠. 가만히 나두면 인간은 '0.001%'정도씩 '나'를 섞습니다. 헌금 내면서 섞고, 교회 출석하면서 섞고, 봉사하면서 섞고, 장로가 되면서 섞고, 권사가 되면서 섞죠. 더 나아가서는 이런 모든 것을 무소유해야한다면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무소유의 노력이라는 것을 섞죠.(교회방식으로 말하면 인본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섞죠) 어떤 방식이든 인간은 누룩을 섞죠. 선택받은 자란 섞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혹은 섞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가 아니라 이것에서 절대 스스로 벗어 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자를 뜻합니다. "방법 = 0% "을 알게 된 자들을 뜻하죠. 그 때서야 비로서 "왜 예수님이 오실 수 밖에 없는가~~!!"가 한 눈끔씩 보이게 됩니다. 그 때서야 비로서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한 발자국 내딪는 시점이 되는 것이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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