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16:1-4(21.12.10.금)

은혜바라기 2021. 12. 10. 09:0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예수를 시험하여'라고 설명이 붙은 이유는 '의도의 불순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즉, 표적을 구하는 모든 동기는 다 불순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표적을 구하는 자를 심지어 음란하다고 합니다. '기적과 표적를 믿어서 잘살게 되는 것을 좋아하는 것'를 음란하다고 하는 것이죠. 오직 우리는 예수님만이 목표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믿고 목표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살기'라면 그것은 '음란'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신랑을 나두고 '이 세상'이라는 옆집 남자와 동거를 하는 셈이죠. 그리고 가끔 진짜 신랑을 찾아가서 '나~좀 옆집 남자와 더 잘살게 해줘~~ 돈 좀 줘.  더 건강하게 해줘~~. 옆집 남자와 사는 집 좀 더 크게 해줘~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러는 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실제로 간음과 음란을 직, 간접적으로 겪게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겪어 보고 그 아픔이 가리키는 실체를 이해하라는 말입니다. 배우자의 간음과 음란을 겪게 되면 죽을 만큼 원망스럽죠. 그것이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음하고 있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 죽어서라도 사랑하시겠다고 이 땅에 내려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신랑 예수님을 배신하고 이 땅의 인본주의와 간음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려고 이 땅에 심어 놓으신 표지판이 바로 이 세상의 간음과 음란의 정체입니다. 
 
 이것을 아주 단적으로 표현한 성경이 호세아서입니다. '간음한 여자를 부인삼아라' 라는 명령으로 이루어진 성경책이죠. 모순입니다. 십계명의 '간음하지말라'와 호세아에게 '간음한 여자와 결혼해라'는 복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모순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눈으로 보게 되면 매우 명확하죠. 
 
 이 호세아를 모델삼아, 사명감으로, 이런 환경의 배우자와 결혼하여 복음을 실천하려는 자들이 있죠. 이것을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여자임에도 정말 마음이 끌려 결혼하게 되면 그것은 다행이죠)  이 호세아는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세아와 같은 사역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호세아와 같은 사역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는 매번 간음하는 호세아의 배우자인 고멜입니다. 이 역할을 절대 혼동하면 안됩니다. 교회에서 이 역할을 혼동하여 교회에서 호세아의 역활을 하려는 자들이 많죠. 그들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 하죠. 주의하세요. 교회에서 예수님의 자리에 서려고 하지 마세요. 교회에 나타나는 '인간의 영향력'은 정확하게 성경에서 말하는 '누룩'입니다. 죄의 시작점이죠. 우리는 오직 '매일 간음하는 고멜'임을 인식해야합니다. 그래야 호세아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십니다. 우리는 은혜를 끼치는 역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는 역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붉은 하늘과 날씨'의 예를 들면서 자연의 법칙을 통해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하시죠. 같은 방식으로 '너희들은 이 인본주의 시대를 보면서 마땅히 '예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느냐?' 다시 말하면, '인본주의 역사의 결과가 '무가치함'으로 귀결되는 것을 왜 모르느냐?'는 것이죠. '인본주의 결과는 항상 무가치함으로 끝나는 것을 역사를 통해, 인생을 통해 항상 인식하면서도 왜 또 그 곳으로 달려가느냐?' 를 말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오직 '요나의 표적'만 보여 준다고 하죠. 그 표적이 뭐죠? 첫째. 큰 물고기에게 삼킨바 되었다가 토해진 사건, 즉,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십자가)과 부활을 뜻하죠. 둘째로 요나의 니느웨성의 전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 두번째 것이 더 중요합니다. 즉, 요나는 니느웨성에 절대 가기 싫어했지만 하나님의 사명으로 가게 되죠. 정리하면, 요나의 표적밖에 보일 것이 없다는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구세주)가 이 세상에 와서 보여줄 것은 오직 복음 외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 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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