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하지 않으시고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하셨을까? 일단 인자의 뜻을 알아야합니다. 인자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뜻하죠. 더 정확하게는 인본주의 속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즉, 인자라고 하신 이유는 '인본주의' 세상으로 오신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것을 뜻하기도 하고 '나'로 대신 오신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인본주의란 복음과는 완전히 반대에 있는 개념입니다. 신본주의와 반대의 개념이죠. 신본주의는 기준이 하나님께 있는 것을 의미하고 인본주의는 기준이 인간에게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그 기준이 그리스도(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인본주의 속으로 오셔서 사역을 하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했죠. 즉, 인본주의 속으로 들어와 계시지만 그 분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예수님이 가리키는 것은 한가지 입니다. 인본주의와 복음을 우리가 분리하여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분리를 '거룩'이라고 합니다. 원어로 거룩은 '분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죠. 이렇게 분리하여 구분하여 예수님을 보게 되면 그 때서야 비로서 예수님이 참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인본주의와 분리하지 못한 채 예수님을 보는 것은 그냥 '인본주의식 신'이 되는 것입니다. 타 종교에 있는 신과 똑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제 3 계명을 어기는 것이죠.
여기서 예수님을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 하나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도 복음을 가리키는 표지판으로만 본 것을 가리키므로 잘못된 고백입니다. 그래서 오직 베드로의 고백만이 정답이 되죠. 이 베드로의 고백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우리의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죠.
그래서 천국 열쇠의 의미도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땅에서 무엇이든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것은 세상인의 모든 것은 복음을 설명하는 상징이므로 이 땅의 모든 것을 복음으로 이해하고 풀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숫자는 7입니다. 이 7은 3+4로 만들어진 숫자입니다. 3은 성부,성자,성령 하나님,하늘,복음의 숫자이고 4는 동서남북 땅의 숫자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인생을 살면서 그것이 가리키는 상징들을 통해 하늘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4+3이 되죠. 그래서 7이 천국이 됩니다. 이 천국의 구성원은 4 * 3 =12인 선택받은 자들, 혹은 교회가 되는 것이죠. 또한 12*12*1000(완전수) = 144,000이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천국에 오도록 인침받은 숫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44,000을 꺼꾸로 풀면 '땅에서 인생을 살면서 복음을 알게 되어 하늘을 알게 된 자들이 모두 완전하게 모인 숫자'를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숫자로 표현하신 이유가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백성으로 '정해진 숫자'가 이미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144,000명은 아닙니다. 이단들이 이것으로 장난치죠. 10명일 수도 있고 1억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해져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숫자로 지정해 두신 것이며 그 숫자안에 복음을 넣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죠. )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시죠. 이것은 아직 십자가의 때가 아니므로 시간을 조율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의 핵심을 제자 외에는 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예정론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복음이 선택받지 않은 자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 하시는 말씀을 하기도 하셨죠.
"마13:15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복음이 아직 깊이 이해되지 않으신 분들은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대부분 '그래도 복음을 깨달아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좋은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시겠죠. 그러나 복음이 스스로 깨달아 진다면 '예수님'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필요가 없다는 말은 정확하게 천국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다시 꺼꾸로 설명을 해드릴께요.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절대 스스로 숨을 쉴 수 있는 자, 즉 생명을 스스로 다시 찾을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 대신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대신해서 '다 이루시고' 모든 '댓가를 치루신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이죠. 즉,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이 정립이 된 것이죠. 이것이 천국입니다. 이것과 똑 같은 장면이 창세기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 즉 죽은 인간이 스스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직접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두루 도는 화염검과 천사들을 통해 접근을 막아 놓으셨죠. 인간은 절대 스스로 생명을 다시 찾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만약 스스로 생명을 스스로 찾게 된다면 예수님이 필요없는 상황이 되므로 그 때는 '복음'조차도 필요없는, 즉 어떠한 방법으로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조금 깊은 사고가 필요한 묵상입니다. 두 세번 반복해서 묵상해보세요.
( 그래도 여러분은 매우 복받은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보고, 듣는 이 복음이라는 정답을 찾지 못하여 그 과정에서 헤매다가 끝난 위인들이 인류의 역사에 다수 존재하죠. 공자, 석가와 같은 종교적 위인들, 아리스도텔레스, 플라툰같은 고대 철학자들, 칸트, 데카르트 같은 근대 철학자들 이 모든 자들이 전부 복음이 가리키는 표지판들을 엿본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전부 복음을 가리키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있죠. 그러나 그들에게 그 목표인 복음, 즉 예수님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엄청난 인과율과 매력적인 논리의 과정은 있지만 결국 허상으로 끝나고 말죠. 현대 철학도 마찬가지 입니다. 근래 가장 유명했던 책 '정의란 무엇인가' 만 봐도 결국 화려한 과정만 있을 뿐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납니다. 정의 곧 진리는 예수님이라는 것까지 절대 도달하지 못하죠. 왜냐구요? 그것이 허용된 사람들은 정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매우 복받은 분들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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