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는 복음이 아닌 인본주의의 걱정에 아직도 사로잡혀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직도 '먹는 떡'을 걱정하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황을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재료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시죠. 그들은 성경말씀을 행위과 결과라는 누룩을 섞어 교훈하죠. 이것을 꼭 찝어 이야기 하는데도 제자들은 다시 한번 '먹는 떡'이야기만 합니다. 딴소리를 하죠. 이렇게 현대교회에서도 '복음'을 이야기하면 그것을 못 알아 듣고 딴소리를 합니다. 결국 복음은 선택된 자들만 듣게 된다는 것이죠. 복음은 천국이라는 지역에 소속된 자들만 알아듣죠. 그래서 그 지역의 소리 즉, 방언의 개념이 여기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은 랄라라라, 케라케라 등등 고급방언, 중급방언 등의 어처구니 없는 이상한 말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의 사건은 '천국백성만 알아듣는 말이 복음이다.'를 설명하는 초대교회의 한정된 에피소드였을 뿐입니다. 심지어 형태가 없으신 성령께서 불의 혀모양으로 연출까지 하셨죠. ' 얘들아. 복음은 혀(말씀)이야, 그것도 불(심판)같은!!' 이것을 설명하신 것이에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시죠. 여기서 작다라는 말은 믿음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믿음이 없는 자들아! 하시지 왜 상대적인 표현으로 작다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나중에 이들은 사도행전에 가서 성령을 받고 믿음을 알게 되는 자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때와 지금을 구분하려는 상대적 표현법을 쓴 것이죠. 그래서 믿음이 없는자 라는 표현보다는 아직 시간적으로 믿음을 받지 않은 상징적 상태를 뜻한 '믿음이 작은 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어찌 떡이 없으므로 논의하느냐?' 이 말은 왜 아직도 인본주의 삶에 갖혀 있느냐? 라는 뜻입니다. '진짜 떡인 나를 보아야 한다' 라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전에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이야기하시죠. 그러시면서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라고 하시죠. 말씀을 복음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꼬집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가 바리새인의 누룩 때문이라고 말하고 계시죠.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단서입니다.
즉, 우리가 현대 시대에서 말씀을 들으면서 그 본질인 복음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정확하게 '교회의 가르침과 설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향력이 어마어마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교회에서 ' 예수님의 향기를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이런 설교를 하고 '구제헌금, 구제사업' 등의 프로그램을 하죠. 이것이 정확하게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복음이란 이따위 설교와 가르침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이것은 어느 종교나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나 이슬람에 가보세요. 하물며 무당이나 이단집단에 가서 설교를 들어보세요. 다 똑같은 패턴입니다. 즉, 교회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전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이 만든 인본주의 종교입니다.
참 복음은 " 우리는 절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래야만 하고, 그래야만 천국에 갈 수 있지만 우리는 단 1도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분이 나를 대신하여 그 길을 가셨고 그 댓가를 치루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셔서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앎)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이것이 복음의 설교입니다. 그래서 참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니죠. 오직 하나님편에서 계획하고, 만들고, 알게 한 종교입니다. 오직 그 분이 오셔서 나를 끌고 가시는 종교죠. 유일무이한 종교입니다. 세상 인본주의 종교들과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죠.
만약 프로그램을 한다고 해도 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교하면서 프로그램을 진행해야합니다. " 우리에게는 남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오직 '돕는다'라는 말은 예수님만 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눈다'라는 말이 그나마 쓸 수 있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도 잘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재물'을 허락하셨죠.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나누는 순간 그 자신이 누구를 돕는, 즉 '자기 가치'를 부여합니다. 이렇게 누룩은 시작되죠. 특히 없는 가운데 조금 나누어서 남을 돕는 것, 없는 가운데 조금 나누어서 헌금을 내는 것, 일면 매우 휼륭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이 보이죠. 정확하게 인본주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이것을 조심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남는 것으로만 나누십시오. 그것도 교회보다는 먼저 가족에게, 그리고 친한 지인들에게 나누십시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1차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도 남으면 공동체(교회, 나라, 지역)에 나누는 것입니다. " 라고 설교를 해야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이렇게 설교를 이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나누면서도 그 나눔을 하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가치'를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통해 '이래서 나에게 예수님이 필요했구나~~~!!' 나는 이 누룩에서 절대 벗어 날 수가 없는 존재구나' 라고 생각하셔야합니다. " 라고 설교를 마무리 할 수 있어야합니다.
교회 목사 사례비가 어떤 교인의 월급보다 많고 교회 목사가 타고 다니는 차가 어떤 교회의 차보다 훨씬 고급차인 것이 정말로 정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시장에서 콩나물 팔아서, 남의 집 청소해 주면서 손에 주어진 돈을 다시 쪼개서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누룩 중에 가장 큰 누룩입니다.' 그렇게 교회에서 가르쳤죠. 절대 아닙니다. 그 돈은 하나님이 그냥 그 분들의 삶을 위로하는 돈입니다. 그냥 맛난 것 사드세요. 조금 풍족해지면 그것으로 더 맛난 것 사드시면서 그 환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복음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른 방향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조금 부족해지는 상황도 만드시죠. 그러면 그 상황을 통해서도 복음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른 방향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너무 많은 재물이 들어 오는 경우 그것을 통해 '욕심'이라는 또 다른 종류의 누룩에 사로잡힐 수 있으니 그럴때 조금씩 '덜어 내는 것'입니다. 그 때 교회에 조금 덜어 내십시오.
물론 하나님이 주시는 환경은 매우 다양해서 단적으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즉, 어떤 교회 목사는 사례비 100만원도 못 받고 그나마 몇달에 한번씩 건너 띄는 경우도 있고 그 목사 혹은 교회와 너무 오랜 관계를 맺어온 성도는 그 관계가 가족과 같은 1차적인 관계로 하나님이 묶어 버리는 경우도 있죠. 그런 경우에는 재물이 조금만 남아도 나눌 수가 있겠죠.
'누룩'은 우리를 예수님의 자리에 올려버립니다. '누룩'은 목표를 예수님에게서 살짝 빗나가게 하죠. 우리는 은혜를 끼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는 대상일 뿐 입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복음을 발견하는데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50년을 사셨나요? 그 50년을 한 손에 쥐고 짜 보세요. 아무것도 안 남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의 인생은 '무가치' 합니다. 그래서 '가치'를 남기려고 발버둥치죠. 그런데 50년 인생을, 한손에 쥐고 짜도 아무것도 아닌 그 인생을, 가지고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이 있습니다. 즉, 그 손이 아닌 아애 다른 것을 보는 자, 즉 왼편이 아닌 오른편을 보는자, 즉 내 손이 아닌 내 인생이 아닌 '예수님'을 보게 된 자들이 있죠. 그것이 정확하게 '선택된 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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