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16:21-23(21.12.15.수)

은혜바라기 2021. 12. 15. 09:00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을 뜻합니다. 성전은 '나'입니다.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냐?' 라고 하시죠.  예수님의 고난은 결국 '선택받은 자'와 관계된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도 선택받은 자 내부에서 일어나죠. 거기서 옛자아를 부인하고 새로운 피조물인 예수님의 지체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절대 옛자아가 변하여 휼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아셔야합니다. 
 
 장로, 대제사장, 서기관들에게 고난과 죽임을 당한다고 하시죠. 이들은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꼭 집어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하셨을까요?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매우 휼륭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과 완전히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죄인됨(먼지됨)'을 계속 인식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필요성이 계속 나타나야합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면서 휼륭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점점 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하는 결정판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휼륭한 사람, 휼륭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이끄는 자들이 복음을 모르는 대부분의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왜 하필 삼일에 살아나실까? 삼이란 숫자는 삼위일체 하나님 즉, 하나님의 숫자, 복음의 숫자입니다. 그래서 굳이 '삼일'이라는 숫자에 맞추신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정확하게 복음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이 모든 에피소드를 복음으로 받지 못하고 인본주의로 인식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거부하죠. 인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휼륭한 사람입니다. 스승의 죽음을 막고 슬퍼하는 제자,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녀, 그러나 정말 슬픈 것은 이것을 통해서 복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사탄아"라고 말하시죠. 최고의 욕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슴에 새겨야합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다 사탄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정의란 나쁜유령이 아닙니다. 사탄이란 '복음을 방해하는 모든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에피소드 바로 직전 즉, 어제 묵상에서 보면 베드로가 말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죠. 그리고 바로 오늘 베드로에게 '사탄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정말로 치밀합니다. 어제의 묵상만을 놓고 보면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이죠. 그런데 오늘의 묵상을 통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죠. 즉, 천국의 열쇠는 베드로가 아닌 베드로의 고백인 '복음'을 통해 천국의 열쇠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천주교의 1대 교황이 바로 베드로죠.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세워 놓고 대대로 후계자를 세워 교회의 황제(교황)을 앞세우죠. 인간의 이런 모습 때문에 오늘의 에피소드를 계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정의를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인본주의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우신 복음을 사람의 일로 풀어서 생각하면 그것이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꼴이 되고 그것을 사탄의 행위라고 정의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말입니다. 이것을 매우 정확하게 설명하신 장면이 바로 '세족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려하는데, 베드로가 제자된 도리로 '제 발을 절대 씻지 못하시리이다. ( =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겨 드려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죠. 그러니 예수님은 '그러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는 자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까지 성경을 통해 가르쳐도 인간은 교회에 단돈 천원이라도 헌금을 해야 마음이 편해지고 교회에서 박수라도 쳐야 뭔가 기여를 하는 것 같죠.  목사는 어떤 설교,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서라도 이렇게 성도를 유도하고 성도의 참석율을 높여야 뭔가 기여를 하는 것 같죠. 심지어 목사는 '아멘'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성도는 '아멘' 하면서 즉각 화답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들에서 인간은 예수님의 '그러면 너는 나와 상관없는 자다'라는 말보다 '자신의 기여도'에 더 영향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죄인된 인간입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부인하십시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는 예배를 드리십시오. 즉, 예수님께서 나의 발을 씻겨주고 나는 그냥 염치없이 묵묵하게 안절부절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뭘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안절부절 나의 발을 닦아 주는 예수님만 생각하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님만 받으신다는 것을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만 받으십니다." 여러분의 헌금, 봉사, 열심, 순교, 희생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으시고 쳐다 보지도 않으십니다. 그 분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 보시고,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시고, 오직 예수님만 받으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품안에 내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 품안에서 내가 나오는 순간 다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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