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실 '따르다'라는 표현은 문학적인 표현이죠. 정확하게는 예수님이 끌고 가시는 것이죠.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기에 그냥 문학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어도 그 본질을 잡아냅니다. 그러나 복음을 모르는 자들은 '문자적 해석'을 하여 자기의 노력으로 따르려고 하죠.
예를 들면, '아침에 해가 뜬다' 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죠. 정확하게는 해는 가만히 있고 '지구가 돈다.' 라는 표현이 맞죠. 그러나 '해가 뜬다'라는 문학적 표현으로도 대부분의 사람은 본질을 이해하죠. 하지만 그 과학적 이치를 몰랐던 중세 전에는 이것을 주장하면 화형에 처해 죽여버렸죠. 이정도로 본질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복음의 진영에 들어와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성경과 인생과 역사'를 대하는 방향은 완전히 다르죠.
본격적으로 해석을 해보죠.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인본주의 내에서의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옛자아를 부인하라'는 말입니다. 거듭난 자들 곧 선택받은 자들도 인생을 사는 동안 옛자아와 함께 살게 됩니다. 이 자들 속의 옛자아가 받는 고난을 '자기 십자가'라고 합니다.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면 내 안에 두개의 자아를 생성하라는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그냥 '나'는 전부 100% 옛자아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나'는 예수님 품안에 있죠. 이것을 옛자아가 상상을 하는 방식으로 즉, 논리적이고 인과율적이고 인본주의적으로 접근하면 절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거듭난 나'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복음'으로만 들여다 볼 수가 있습니다. 즉, 나의 무가치함과 죄됨를 인식하고 완전히 '넉다운' 되는 순간 예수님의 필요성 즉, '이래서 예수님이 나 대신 오셔서 대신 사셨구나~~ 나 대신 오셔서 말씀을 다 이루셨구나. 나 대신 오셔서 죽으셨구나~~'의 과정에서만 '거듭난 나'를 인식하게 됩니다. 인간은 뇌가 무엇이라도 인식하는 순간 저절로 '내가 기준'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절대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죠. 그런데 복음이 외부에서 들어와 나의 눈을 강제로 뜨게 하는 순간만큼은 '예수님의 기준'으로 보게 됩니다.
이런한 인식의 시간도 엄밀하게 따지면 불과 몇 초도 안됩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의 순간이 몇 초가 되었던, 하루종일이 되었던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중심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우리가 선택된 자라는 것을 잠시 알려주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앎'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무가치한 죄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 절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고난'이라는 광야로 이끌고 가시죠.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면 우리는 절대 옛자아의 성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옛자아에게 고난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을 찾기 때문이죠. 이 옛자아에게 쏟아지는 고난을 요한계시록에서 7봉인, 7나팔, 7대접으로 표현되었죠. 이 계시록의 고난은 선택되지 못한자가 받을 고난이 아니라 선택된 자들 속에 남아있는 옛자아, 즉, 인본주의의 '내'가 받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오직 선택된 자들이 보는 책입니다. 선택되지 않은 자들에게 유치하게 협박하는 책이 아닙니다.
이 고난을 구약에서는 광야로 표현했죠. 그 광야의 고난에서 우리의 옛자아는 다 죽어야합니다. 그래야 거듭나게되죠.(이것을 표현한 것이 이스라엘 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는 것이죠)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되어 예수님(여호수아)과 가나안(천국의 상징)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 가르쳐 준 제사를 통해 죄를 용서 받아서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복음을 1도 모르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전부 100% 지옥입니다. 조금 어렵습니다. 잘 따라오세요. 구약의 사람들이 전부 지옥에 간 이유는 예수님이 안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타락하고, 솔로몬도 타락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왕은 전부 다 타락하는 장면으로 나오죠. 예수님이 안계시면 전부 다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3차원의 세상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입니다. 즉, 제사를 통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다. 즉, 우리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죠. 그리고 예수님은 3차원에 갖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과거,현재,미래 모두 계시죠. 그래서 구약의 사람들 중에 그 분이 원한 그 분의 신부들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잘 이해하셔야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인간이 구원에 단 1도 기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힌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예수님이 기준, 예수님이 주인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눈끔' 정도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고 이것을 잠깐 우리의 인생에 들어 오셔서 알려주신 것 뿐입니다. 이 때의 '알려주심'을 믿음이라는 단어를 차용해서 설명하신 것 뿐이죠.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과는 차이가 큽니다. 아니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그래서 재미있게도 구약에서도 선택받은 자들은 예수님을 잠깐이나마 인식하는 순간이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각 선지자들이 예수님을 예언했고 다윗도 '내 주의 주'라는 표현으로 예수님을 잠시 인식하게 되죠. 너무 신기하죠? 결국 구약의 사람들이나 신약의 사람들이나 전부 평생 옛자아에 묶여서 지옥에 가는 모양새지만 그 중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잠깐 오셔서 '너는 내 신부다'를 짧게 알려주는 모양새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드러낸 에피소드가 예수님의 우편강도죠. 평생 나쁜짓만 하다가 죽기 직전에 단 세마디 "저 분은 우리처럼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죄로 죽는 것이다." "천국에 가실 때 나를 기억해 주소서" 이것으로 완벽하게 '너는 천국을 있을 것'이라는 보장을 받게 되죠. 예수님이 왜 이 장면을 그 분의 대인사역 마지막에 넣어 놓았는지 잘 생각해보세요. 마지막, 즉 결론을 왜 이 장면으로 선택하셨는지를 잘 생각하셔야합니다. 그래야 '나를 부인한다'라는 말씀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도 반전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를 완벽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완벽하게 완성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이신 것을 버리시고, 즉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완벽하게 자기 십자가를 지셨죠.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것도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예수님의 옷만 입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결국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예수님만 바라보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만 바라보는 자아를 '거듭난 자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땅 이야기를 잠깐 해보죠. 우리가 죄를 지어 하나님과 분리된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수고하여 땅(흙)을 갈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풀어보죠. 인간은 사실 흙(아무것도아님=nothing)이죠. 하나님은 흙을 아무리 수고하여 갈아도 그냥 흙인 것을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 우리는 노력을 통해 흙을 생명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냥 계속 흙이에요. 그런데 그 흙을 쌓으면서 "내가 높다. 너가 높다"하고 있는 것을 죄 즉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흙에 씨가 들어가면 생명이 열리죠. 이 씨가 예수님입니다. 즉, 흙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야만 생명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흙을 죽을 때까지 갈게 하시는 것은 '씨가 없이 아무리 갈아도 흙에서 생명이 나지 못한다'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고 이것은 정확하게 '인생을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다' 즉, 인생을 살게 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의 무가치함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씨앗되신 예수님만 기대하고, 소망해야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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