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17:14-20(21.12.22.수)

은혜바라기 2021. 12. 22. 09:09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간질이라는 병을 다다음절에서 '귀신이 나간다'라고 표현되죠. 현대과학적으로는 맞지 않죠. 성경을 과학이나 논리로 해석하면 모순이 생겨 납니다. 성경은 복음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그 복음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설명을 하는 책이 성경입니다. 즉, 무한한 것을 유한한 도구로 유한한 존재에게 설명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보면 모순이 드러나고 어색한 부분이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면, 애기가 어떻게 생기는지를 부모가 4살짜리 자녀에게 가르친다고  생각 해보세요. 어떤 부모도 4살짜리 자녀에게 성적인 방법을 자세히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부분 '엄마와 아빠가 사랑해서 너를 낳은 것이야'라고 말하죠.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본질'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즉, 엄마와 아빠의 사랑의 결실이 바로 자녀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죠. 그런데 그 아이의 수준에서는 그 부분에서 모순을 느낍니다. '나도 아빠를 사랑하는데 난 왜 애기가 없지?'이런 모순이 생겨버리죠.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이런 차이는 훨씬 더 벌어집니다. 인간의 아이는 10년 정도 지나면 부모가 말하는 본질을 알게 되지만 인간이 말씀의 본질을 깨닫는데는 무한한 시간이 걸립니다. 즉, 불가능하죠. 그래서 말씀은 우리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알려주는 것만 알게 되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이것을 눈을 뜨는 것이라고 하죠. 이것을 거듭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간질이 되었든, 귀신 들린자가 되었든, 소경이 되었든, 이것들은 우리의 상태를 말해주는 상징입니다. 우리가 인본주의에 갖혀 넘어져서 죽어가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키죠. 이것을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는 장면으로 전개되죠. 그 이유가 믿음 없는까닭이라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옆에 같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다고 합니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한 포커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패역합니다.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자에서 어느날 부터 믿음을 가져 패역하지 않는 자로 바꾸어져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는 그날 까지 '믿음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겨자씨보다도 작은 믿음 조차도 없고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이것을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즉, 내가 믿는 믿음과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앎의 믿음의 차이를 깨닫는 것이 눈을 뜨는 첫 걸음입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설명해드리면,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는 모습을 통해 인간은 절대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시죠. 그리고 이 장면은 그 제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글을 읽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즉, 이 장면을 통해 '나는 절대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존재구나'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된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가 모양이 같아서 같은 단어라 착각을 하는 것이죠. 이 두 단어는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나중에 나온 '믿음'이 참믿음이죠. 그런데 그 믿음은 어떻게 생긴것이죠?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앎'이죠. 이 '앎'만이 참믿음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원해서, 공부해서, 노력해서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님의 신부를 찾아서 알려주시는 것으로 시작이 되죠.  

 

 진짜 믿음을 알게되면, 즉, 진짜 '앎'에 거하면 내가 무엇인가를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즉 나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나의 판단, 나의 믿음이 다 부정되어집니다. 그래서 완전히 마음이 가난(가치=0)해지죠. 이 때서야 우리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게 됩니다. 그것 밖에 잡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리고 그것이 온 천하보다 더 단단하고 값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참 위로를 받게 되고 그 위로로 참 평강에 놓이게 됩니다.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는 말씀이 있죠. 이 말은 물체이동의 기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확히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산은 성전을 말하죠. 성전은 교회 즉,  선택받은 자들을 뜻합니다. 이 선택받은 자들은 원래 인본주의에 묶여 있죠. 그런 그들을 복음의 진영으로 옮긴다는 뜻입니다. 어떻게요? 믿음으로. 이 때의 믿음은 오직 예수님만 가지고 있는 믿음이죠. 결국 우리는 단 한 알도 없는 믿음이지만 그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가지고 계시죠. 예수님께서 가지신 믿음으로 우리(산)를 인본주의에서 복음의 진영으로 옮기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더 반복해보죠.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는 이 말씀이 정확하게 아까 말씀드린 아이에게 '애기가 생기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아이의 눈, 즉 인본주의 시각으로 보게 되면 '기도 열심히 하면 백두산을 남쪽으로 옮길 수도 있다.'라는 방법론으로 접근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본질을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할 수 없다. 참믿음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님은 할 수 있다. 오직 참 믿음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리고 더 깊은 말씀의 본질인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산(교회)을 복음의 진영으로 옮길 것' 을 이 글을 읽는 우리, 즉 예수님의 신부에게 설명하는 것이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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