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복음에 대하여, 천국에 대하여 계속 듣고 있는 제자들의 질문이 "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라고 하죠. 이 말은 지금 교회에서 '천국에서 상급을 받자.'라는 것과 같은 의미의 인본주의적 천국관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된 오직 한가지 이유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누누히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약간의 '행복'을 창조하신 이유는 천국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재물을 얻게 되고, 좋은 자리를 얻게 되면 약간의 '행복'을 느낍니다. 이 행복을 알게 하여 천국의 속성을 엿볼 수 있게 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이 약간의 '행복감'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천국의 속성을 엿볼 수가 없기 때문에 천국을 바라지 못하겠죠. 그래서 이 약간의 '행복감'을 창조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100평에 살던 사람이 1000평으로 이사갈 때나 10평 살던 사람이 30-40평으로 이사갈 때나 행복감은 비슷합니다. 대통령으로 당선이 될 때나 취준생이 대기업의 말단직원에 뽑힐 때나 행복감은 비슷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복감의 한계를 그으신 이유는 '행복감'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감이 가리키는 방향이 목적입니다.
이 행복감은 천국의 속성을 계속 가리키고 있고 그것을 인간이 바라도록 만들어 놓으셨죠. 그리고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라고 누누히 말씀 드렸죠. 즉, 이 행복감이 가리키는 최종 목표는 예수님과 나의 관계에 집중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행복감은 일정 수준 이상 높아지지 않습니다. 그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이것을 더 높여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이 인생, 즉 인본주의 바벨탑의 꼭대기로 향하는 노력입니다. 아무리 그 꼭대기로 가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모르거나 인본주의 천국을 바라는 종교를 만들어 내는 어리석음으로 귀결되죠. 그 장소(인본주의 꼭대기 혹은 인본주의 천국)에 도달하면 이것보다 몇 천배 더 확장된 행복감이 있을 거라고 착각하죠. 그리고 이 땅에서 그곳에 가려는 노력(종교,윤리,봉사,기부)을 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이라는 실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눈을 뜨지 못한 맹인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면서 부터 맹인인 자가 '빨간 장미'를 어떻게 상상하겠습니까? 설명과 이해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하죠. 오직 그 분이 오셔서 나의 눈을 만져 주시는 은혜만을 소망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의 어떤 부분이죠?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아이들의 순수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절대 아이들은 순수하지 않습니다. 착하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악합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재미있게도 성경은 저주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7일동안 '부정한 자'가 됩니다. 그 이유는 '죄덩어리를 낳은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더 재미있게도 여자가 여자 아이를 낳으면 그 두 배인 14일 동안 '부정한 자'가 됩니다. 즉, '죄덩어리를 낳을 수 있는 자'를 낳은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 시각에서 보면 웃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전부 '복음'을 설명하시는 중(ing)인 것입니다. 인본주의적 선악으로 구분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설명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자녀는 절대 부모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자녀는 그 부분이 결핍되어 태어 납니다. 자녀는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뿐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착각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더 자녀의 필요에 마추어 쏟아 붓죠. 그것에 마추어 자녀는 자기의 필요를 더 어필하기 위해 기대는 행위를 하죠. 그런데 부모는 이것을 '나를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신 이유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복음'때문입니다. 재미있게도 이것을 실험한 것이 있었습니다. 정말 사랑했다고 믿는(?) 부모가 죽었을 때 자녀의 슬픔을 심리학자들이 연구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슬픔의 깊은 뿌리가 '부모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것 중 하나가 없어진 상실감'이 대부분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자기 상실감'이 클수록 더 슬퍼한다고 합니다.
( 자녀가 부모의 장례식에서 펑펑 울기를 바라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평소에 자녀에게 모든 필요를 다 쏟아 붓도록 하십시오. 그 어떤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것을 다 쏟아 부어주면 아마 부모가 죽을 때 느끼는 상실감은 더 커지겠죠. --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 오직 사랑은 부모가 자식한테만 가능합니다. 즉, 이렇게 부모를 사랑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가 필요할 때만 손 내미는 자녀임을 알면서도 그냥 주게 되고 심지어 뼈, 골까지 다 빼어 주는 부모도 많이 계시죠. 그런데 이것도 그 부모가 휼륭해서가 아니라 모든 부모는 이렇게 창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본능이죠. 이것은 짐승도 그렇게 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
복음을 알면 우리의 인생관이 전부 다 바뀝니다. 이 세상이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녀는 절대 부모를 사랑할 수 없고 오직 부모만 자녀를 짝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이렇게 만드신 이유가 정확하게 성경구절에 나와 있죠. ( 개인적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제가 유일하게 성경을 읽으면서 눈물이 난 구절입니다. )
"요1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먹먹...)
그렇다면 왜 오늘 말씀에는 우리가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간다고 하셨을까요? 그 어린아이의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바로 "부족함"입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절대 결핍을 완벽하게 본능으로 아는 자' 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오직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자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절대 이 어린아이같은 마음을 먹지를 못합니다. 사람은 대부분 자기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하다가 안되는 부분이 생길 경우에만 기도하여 결핍을 채우려고 하죠. 이것은 절대 순종의 범위가 아닙니다. 주님을 이용하는 것뿐이죠.
절대 순종이란 '나의 모든 삶을 부인하고, 나의 모든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은 절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 순종을 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 오신 것이죠. 그 분은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그 실체를 비우시고 이 땅의 짐승(나)의 먹이(말구유에서 태어나심)로 오셨습니다. 가장 어린 자(가장 낮은 자)로 오셨죠. 그래서 그분이 하늘에서 큰 자입니다.
결론은 오직 어린아이와 같으신 분는 예수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며, 오직 그 분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하늘에서 큰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된 자들은 예수님의 품에 거하게 되죠. 우리는 단지 은혜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것을 복음(복된 소식)이라고 합니다.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 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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