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18:12-14(21.12.28.화)

은혜바라기 2021. 12. 28. 09:36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양 백마리는 완성된 천국을 뜻합니다. 그 중에 길 잃은 양은 '나' 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길 잃은 양을 찾는 방법은 예수님 자신이 길 잃은 어린 양으로 오신 것 입니다. 길 잃은 양이란 죄인된 나를 말하며 이 죄는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죄인인 나'로 오셨죠. 예수님께서 '나'로 오셔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나'를 찾으신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죠. 100마리의 양 즉, 천국의 완성을 뜻하죠.  

 이렇게 찾게 된 '나' 를 아흔아홉 마리보다 더 기뻐한다고 하시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칭하여 '이는 내가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죠. 똑 같은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찾은 것을 기뻐하시지만 그것은 결국 '예수님'를 기뻐하신 것이죠. 결국 선택된 자들은 예수님과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의 지체라고 하죠. 예수님과 나는 한 몸입니다. 

 이렇게 복음에서 '한몸사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죄란 '하나님 기준'에서 분리되어 '자기기준', 즉 '인간기준', 즉 '인본주의'로 바뀐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 사건이 '선악과 사건''이죠.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것 그 자체가 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기기준(인본주의)'에서 천국을 만들 수 있다고(행복해 질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 스스로 천국을 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죠. 그것이 '율법'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 만든 모든 법은 모두 하나님의 율법의 영향력 속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을 주시면서 인간이 '이것은 절대 지킬 수 없군요'라고  손을 들고 항복하기를 바라신 것이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인간은 그 율법을 지켜냅니다. 인간은 어떻게 이것을 지켜낼까요? 재미있게도 이것을 '인간기준'이라는 방법으로 지켜냅니다. 즉, 나보다 거짓말을 더 많이 하는 자를 보면서 '난 거짓말 거의 안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나보다 불성실한 사람을 보면서 '난 성실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항상 거짓말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제공하고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시면서 '이렇게 사람은 거짓말을 한단다. 이제 그만 항복해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본 인간은 '난 저 사람처럼 거짓말 하지 않는 착한 사람이야'라고 생각을 하죠. 이것이 인간 스스로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죽은자'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한 복음서의 모든 이야기가 이 말씀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지킬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죠. 마음에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 형제를 미워만 해도 살인,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뽑아야 됨, 원수를 내 몸같이 사랑 등등 전부 다 인간이 율법의 기준을 잘 못 해석한 것을 다시 율법의 본질을 회복하여 제대로 해석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절대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 즉, '너희는 모두 죽은 자'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나'로 오신 것입니다. 나로 오셔서 나로 사시고 내가 저지른 모든 범죄 때문에 십자가 처형을 대신 받으시고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시면서 '나'를 그 분의 가슴에 품고 부활하신 것이죠. 이것이 그냥 '이야기'로 즉,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거나 그냥 이해만 될 뿐인 분은 아직 복음을 잘 모르는 분인 것입니다. 이 사실이 완벽하게 '나의 유일한 살 길 이었구나'를 알게 된 분들만이 복음을 알게 된 분들입니다. 그래서 복음(복된소식)입니다. 상대적으로막다른 골목에 이른 자만이 복된소식을 알게 되는 시스템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1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자들이죠. 

 

 성경은 구약에서 신약 그리고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이 주제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사실 단 한줄로 요약이 가능하죠. 그리고 이 주제 밖의 이야기는  전부 '이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단 한가지 주제로 결론이 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렇게 두꺼운 이유는 그 만큼 인간의 죄가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제 묵상도 결국 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오직 복음 하나죠. 그런데 이 묵상을 접고 다시 세상에서 살다보면 '무조건' 인본주의에 빠져 복음을 잊죠. 이것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선택된 자들 조차 이렇게 인본주의와 복음을 왔다 갔다 하면서 복음의 방향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즉, 검은색과 흰색을 왔다 갔다 해야만 흰색이 흰색인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죠. 그런데 선택된 자들은 유기된 자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검은 색만 보고 있는 상태에서 다시 흰색을 보여주면 '아 그렇지 희색이 진리지'라고 볼 수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선택받은 자가 '단란한 가정과 행복한 가정' 에 대하여 꿈을 꾸고 이야기하고 있을 때 다른 어떤 자가 거기에 복음을 던진다고 해보세요. 즉, '그 모든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놓으신 것 뿐이야 그 행복한 가정에 매몰되서는 안된다.' 라고 했을 때 선택받은 자들은 그것에 고개를 끄떡 끄떡 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기된 자, 즉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은 '꼭 그렇게까지 이야기해야 하냐?' 하면서 화를 내죠. 더 무서운 것은 이것이 정확하게 심판, 즉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의 '갈라짐'이라고 합니다. 

 

 다윗의 밧세바 강간과 그 남편을 살인한 사건이 바로 이것을 알려주기 위한 하나님의 설명입니다. 즉, 이 에피소드의 주제는 다윗의 범죄가 아닙니다. 다윗을 잠시 범죄자로 하나님이 만드셨죠. 즉, '나'로 만드셨죠. 그리고 나다 선지자를 통해 말씀(복음)을 주셨을 때 다윗이 바로 알아듣게 되죠. 즉, 이 이야기의 촛점은 '죄를 짓는다.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 가 아니라 "선택받은 자는 복음을 알아 듣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단 하나의 주제를 위해 다윗을 왕으로 만들어서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인식시켰고, 그를 아내를 탐하고, 간음하고, 남편을 살해하고, 부하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자로 만들어서 10계명의 하반절인 5계명을 확실하게 어기도록 만드셨죠. 즉, 완벽한 죄인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정리하면  바로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완벽한 죄인인지만 선택받은 자'인 다윗을 만드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흔아홉이라는 것은 완성되지 못한 천국을 뜻하고 나머지 한 마리를 찾는 것이 완성된 천국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완성의 천국이 아닌 완성된 천국을 원한다는 뜻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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