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함과 같다고 하죠. 이것은 어린아이를 잘 대해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라고 하지 않고 어린아이 하나(단수를 강조)라고 한 것이죠. 어린아이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했었죠? '부모(하나님)께 절대 순종(의존)'을 지닌 자입니다. 인본주의 눈으로 보게 되면 성경을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의 관점으로 읽게 되요. 그러면서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는 것이죠. 그 해석의 도구가 우리의 인생, 인류의 역사 그리고 자연과 우주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성경(복음)해석의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나(예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라고 하죠. 이제 부터 어렵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작은 자 중 하나'도 결국 예수님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말은 '예수를 믿는 예수'라는 말이 되죠. 이게 뭘까요? 이게 바로 복음의 진영에 들어 있는 우리의 실체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신부의 실체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지체라는 말의 실체입니다. 우리의 영향력이 1%도 들어있지 않은 구원을 뜻하죠. '예수를 믿는 예수' 이 말은 인본주의에서는 절대 해석이 불가능한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눈으로 보면 완벽한 '복음의 정의'가 되죠. 결국 거듭난 나는 예수님과 분리해서 해석될 수가 없습니다.
이 '예수를 믿는 예수'를 실족하게 하면 절대 안되죠. 복음의 성립이 안됩니다. 그러느니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낫다고 하죠. 이 부분은 인본주의의 죽음을 뜻하죠. 옛자아의 죽음이죠.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이 부분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이 십자가에 함께 죽었죠. 그래서 실족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손과 발을 찍어 내버리고 눈을 빼어 버리라는 말은 결국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이것을 다 하신 것이죠. 당연히 우리가 눈도 빼고 손발도 잘라야 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대신 하신 것이죠. 예수님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하죠. 똑같은 구조입니다.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선택된 새로운 피조물로써의 '나'이기도 하죠. 이것을 구분하는 순간 복음의 의미가 없어지게 되므로 이것을 구분하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예수님의 이야기를 성령께서 알게 하여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죠. 생명책은 예수님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안에 태초부터 들어와 있는 선택된 자들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생명책에 들어 와 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역사와 인생입니다. 80년의 전 인생을 통해 "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님으로 인하여 생명책에 들어와 있구나."를 확인하는 것이죠. 이것이 천지창조의 목적입니다.
( 오늘 묵상은 많이 어려웠죠? 그런데 참기독교가 말하는 진짜 복음의 실체를 엿보신 것입니다. '나의 기준'에서 탈출하여 '예수님의 기준'으로 성경과 역사와 인생을 보는 것이 복음입니다. 나의 삶이 실체가 아니고 예수님의 삶이 실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중에는 '꿈'입니다. 잠 자다가 꿈을 꾸면 그 순간은 그것이 실체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잠을 깨면 그것은 단지 꿈이라는 것을 알고 실체(현실)을 접하게 되죠. 이 메카니즘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아셔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생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하신 매우 소중한 도구입니다. 지금 우리는 80년의 긴 꿈을 꾸는 것이죠. 복음을 알게 된 자는 바로 이 꿈(인생) 속에서 '아! 이것이 꿈이네' 라고 알게 된 자들을 뜻합니다. 이 후 진정한 실체인 천국과 지옥이 남아 있죠.
나의 인생은 옛자아가 얼마나 무가치하고 무능력한지를 확인하는 것이 전부 입니다. 이 꿈 속으로 예수님이라는 유일한 실체가 들어 오셔서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 즉 복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 꿈 속에서 돈, 명예, 지위, 정치, 신앙이 주는 가치를 쫓아 버둥버둥거리는 것은 '가위눌리는 것' 처럼 '무가치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직 우리의 실체는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다 이루었다' 안에 우리가 들어 있죠. -- 이것이 조금 이해가 힘든 경우에는 나의 실체는 2천년전에 예수님 품 안에서 살았고, 그 분과 죽었고, 그 분과 함께 부활했다고 믿으세요. 그리고 지금의 삶은 내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확인하는 작업 즉,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난 어쩔 뻔 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