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도, 제자들이 이것을 꾸짖는 것도 모두 인본주의적 사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체의 행위가 옳은가? 옳치 않은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용하여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은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옳바른 방향성이죠.
재미난 예를 들어보죠. 만약 현대 교회의 예배 중에 어떤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다고 하죠. 이 때 갑자기 한 집사가 자기의 아이를 설교단까지 데리고 나와서 기도요청을 했다고 해보죠. 이 행위가 옳은가요? 옳지 않은가요? 기본적으로 우리는 질서와 규칙에 의해 움직이죠. 특히 집단일 때는 더욱 그러하죠. 그것을 무시한 경우 그 집단은 유지가 안됩니다. 이 집사가 그 날 뿐 아니라 매주마다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 그 예배를 계속 이어 나가기 힘들겠죠. 그래서 옳지 않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바쁜 와중에 어린 아이가 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고 오는 것을 금하지 말하고 했는데 목사가 그것을 안된다고 할 수 없죠. 그러나 매주 그런 식이면 예배는 항상 망치죠. 어떻게 해야하나요? 선택이 안되죠! 모순이 나죠.
교회에서 지도자들이 말하는 행위는 전부 이 범주에 들어갑니다. 특히 잘 나가는 교회일수록 모두가 인정하는 종교 규범의 잣대를 가지고 있죠. 종교와 인본주의(행위) 둘 다 만족시킵니다. 이것을 인본주의종교라고 합니다. 정말 조심해야합니다. 인본주의는 목표를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목표를 향해서 나의 눈을 마추어야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있는 격입니다. 이 손가락(인본주의)에 갖혀있는 것을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어린아이는 결핍을 완벽하게 아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는 부모에게 절대의존적 존재입니다. 이 부모에게 벗어나기 시작하면 죄인이 되는 것이죠. 과녁에서 벗어난 존재란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부모(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의 기준인 인본주의에 묶여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오직 어린아이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천국은 그분의 것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께 절대순종을 하셨죠.
"롬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끝.
(( 일단 오늘의 묵상은 끝났지만 잠시 "의"에 대한 고찰을 해볼께요. 이것도 따로 묵상해보셔요. 복음의 옷자락을 살짝 잡을 수 있는 힌트가 될 것입니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된 묵상이에요. 매우 어렵습니다. 난이도 상.
"요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예수님께서 내린 '의에 대한 정의'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와 너무 다르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니까 우리가 다시는 예수를 보지 못하는 것을 의라고 하시죠. 이게 어떻게 의를 설명하는 것일까요?
인본주의에 속해 있는 옛자아는 절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옛자아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내가 기준이 되어 바라 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죄로 오염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어느 종교에나 있는 '심리적 기대의 정점'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건 다 가짜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짜라기 보다는 상징입니다. 유한한 우리에게 무한한 하나님의 믿음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잠시 '차용'된 단어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내 옛자아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를 아는 것이 진짜 믿음이 되죠. 정확히는 거듭난 자아가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 되는데 이 거듭난 자아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옛자아의 기준으로는 느낄 수가 없죠. 그러나 느낄 수는 없지만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십니다. 매우 어렵죠?
예를 들면 성령께서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너는 느낄 수가 없지만 너의 거듭난 자아는 이미 천국에 있는 예수의 품 안에 있단다. 이 땅의 너는 옛자아로 있으면서 고난을 통해 현실의 가치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오직 저 위의 예수님안에 있는 거듭난 너를 생각해보렴. 그것이 평강이란다."
매우 매우 어렵죠? 설명하는 저도 어렵네요. 이것을 설명하는 성경말씀이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십자가에 같이 못박혔다는 말씀입니다. 전체적 문장을 이해하셔야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땅에 '의'는 없습니다. 오직 '의'는 예수님 뿐이며, 그 분은 이미 천국에 계시죠. 이 땅에서 우리의 옛자아가 볼 수 있는 '의'란 없다는 것이 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요즘 유명한 책인 '정의란 무엇인가?'의 결론도 결국 '본질적 답'을 내어 놓지 못하죠. '의'란 이 세상에 이제는 볼 수 없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핵심이긴 한데 본질은 아닙니다.
본질은 '그 천국에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어 예수님과 같이 있다는 것' 입니다. 그것을 이 땅에 살면서 내가 알게 되는 과정, 즉 복음을 알게 되는 과정이 바로 '인생' 입니다.
여기서 파생하여 조금 더 어려운 부분을 한가지만 더 짚어 드리죠. 그래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실체적으로, 본질적으로 만드신 천지창조는 창세기1장이 아닙니다. 진짜 실체적 천지창조는 '예수님의 품 안에 선택되어 들어 있는 새로운 피조물인 나'입니다. 이것이 의미적 순서로 먼저입니다. 아니 유일한 실제 창조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그 사건을 통해 '다 이루었다'의 외침이 정확한, 실체적, 본질적 창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why(사랑), how(복음), who(예수님), where(십자가) 등등'을 설명하시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든 것이 '창세기 1장~', 즉 천지창조, 즉 인류와 자연의 역사 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연극무대를 잠시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죠.
즉, 시간이라는 것을 창조하시고 창세기1장을 인류역사의 맨 앞에 위치해 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헤깔려하는 것 뿐입니다. 영적인 세상에서 이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는 의미론적으로 맨 뒤에 위치합니다. 즉, 예수님이 신부를 결정하시고 그 신부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 붓고 '다이루었다'를 선언하신 것이 영적으로 가장 첫 장면이 되죠. 그 이후 그 신부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레고'라는 조립식 장난감을 만들어서 하나 하나 그 분의 사랑을 설명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만들어짐과 동시에 멸망까지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레고'라는 조립식 장난감은 교육에 필요한 것 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