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18:21-35(21.12.31.금)

은혜바라기 2021. 12. 31. 08:59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베드로가 묻는 질문인 "형제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의 의도는 명백하게 인본주의적 발상입니다. 즉, '용서의 노력을 얼마나 해야하는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게서는 이 질문을 이용하여 복음을 설명하시죠. 성경은 늘 복음을 이런식으로 인본주의의 선과 악의 구조를 이용하여 인본주의 자체가 죄이며 거기서 벗어나 예수님께 향하는 것만이 선이라는 복음을 설명하십니다.

 '일곱번을 일흔 번까지 [ 7*(7*10) ]' 의 뜻을 살펴보죠. 일단, 7이라는 숫자는 천국의 숫자이고 10은 완전수입니다. 즉, 지금 말하고 있는 에피소드는 천국과 복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리고 천국의 숫자 곱하기 완전수이기 때문에 끝없는 용서를 뜻합니다. 절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만 하시죠.

 그런데 이 용서의 주체가 누구이고 대상이 누군인지에 대한 해석이 갈라지게 됩니다.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내가 타인을 끝 없이 용서해야 한다.' 입니다. 그런데 노력하다 보면 못 할 때가 있는데 그 때는 '그냥 반성'하던지, '그냥 무시하던지', 아무튼 모순에 빠지죠. 복음적 결론이 안나죠. 복음적 결론이란 무조건 예수님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용서의 주체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용서의 대상'은 바로 '나'입니다. 성경은 나와 타인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있더라도 그것은 나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래서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판은 타인과 나를 분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이란 '나'의 객관적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타인을 만드신 이유는 그 타인을 통해 나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즉, 타인은 거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직 용서의 대상일 뿐입니다. 

 또한 중요한 촛점이 한가지 더 있습니다. 예수님이 용서한 나를 내가 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용서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합니다. '내가 나를 벌주는 것' 이것을 인본주의의 꼭대기에 서 있는 자들은 회개 혹은 겸손으로 착각합니다. 다음 이야기를 보면 좀 더 확실해집니다.

 만달란트는 지금의 화폐기준으로 몇 조원의 금액입니다. 즉, 갚을 수 없는 돈이라는 뜻입니다. 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임금(주님)께 빚을 탕감 받죠. 그런데 정작 본인은 자기에게 백 데라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죠. 백 데라리온은 대충 5백만원 정도의 금액입니다. 노력하면 갚을 수 있는 돈이죠. 그런데 그것을 용서하지 못하죠. 이 후 그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은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의 에피소드입니다. 

 

 여기서 백 데라니온 빚진 동료는 바로 '옛자아인 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동료'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결국 논리적으로 풀어 보면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이 용서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복음적 결론이 아니죠. 복음적 결론으로 해석하면 '인본주의라는 '참죄'를 용서받은 자들은 인본주의에 속한 죄로 부터 자유롭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른 방향으로 말하면, 유기된 자들은 항상 인본주의에 속한 죄에 붙들려 산다. 즉, 율법에 붙들려 산다는 말입니다.

 

 이 에피소드를 읽어보면 누구나 느끼는 '공통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참~ 어리석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어리석은 자가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나로 사실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 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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