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19:1-12(22.01.03.월)

은혜바라기 2022. 1. 3. 09:5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병을 고치시더라'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이야기죠.  인본주의라는 병을 고쳐 구원을 받게 하려는 예수님 사역의 정체성을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 '병을 고치시는 에피소드'입니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분의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무한한 분의 뜻(복음, 사랑)을 전하죠. 
 
 오늘의 핵심 주제는 '이혼'입니다. 남자는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여자는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 부모를 떠난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으로 내려온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여자의 입장에서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예수님과 교회는 한 몸이 되죠. 이것을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으니 어느 누구도 폐할(이혼할) 수가 없죠.  

 바라새인은 계속 인본주의 관점의 이혼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이용하여 복음을 설명하고 계시죠. 그러므로 우리는 바리새인의 관심에 촛점을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에 촛점을 마추어야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성경해석의 원리입니다. 바리새인이 이야기하는 것을 풀어가면서 복음을 알아가려는 방식은 독입니다. 바리새인이 이야기하는 것 중에 예수님이 복음으로 사용하려는 줄기가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핵심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배운 우리의 논리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찾아가는 방식으로는 절대 복음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성경해석은 이미 성령께서 나에게 주신 도구(눈을 뜸, 거듭남)로 성경을 들여다 봐야합니다.)

 핵심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에 있습니다. 음행이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교회(나)를 뜻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을 떠나서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나는 음행한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버려도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음행한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다시 나(교회)를 신부로 맞이 하시죠. 이것을 잘 나타낸 성경이 호세아서 입니다. 호세아서에서 호세아는 예수님 그리고 창녀 고멜은 나로 표현되었죠. 

 

 이 때 제자들이 '그러면 장가들지 않는 편이 좋다'라고 하죠. 당시 유대인의 관습적 율법은 남자가 장가를 갔는데 여자가 뭔가를 잘못하면 그것을 꼬투리 삼아 이혼할 수 있는 '모세의 이혼증서법'을 매우 보편적으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간음함(죄)이라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시니 장가 자체를 안가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행위로 이해하고 다시 행위로 원인을 차단하는 완벽한 인본주의적 결론입니다. 이 말은 분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이용하여 예수님께서 복음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시는 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촛점은 '간음한 여자라도 내가 선택한 여자라면 그것을 품겠다'입니다. 즉, 율법이 아닌 긍휼이 촛점이죠. 오늘 말씀이 조금 복잡합니다. 다시 정리해보죠. "여자가 간음한 것이 아니라면 절대 남자는 여자를 버리면 안된다는 것이 말씀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여자(나)는 간음을 했죠. 그래서 버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간음한 여자를 남자(예수님)가 다시 찾아서 품죠. 그것은 반대로 남자(예수님)가 간음한 것, 즉 율법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래서 남자가 죽습니다. 즉, 여자의 죄 때문에, 더 근본적으로는 그 여자를 사랑하고 긍휼하는 남자의 마음 때문에 남자가 죄인의 탈을 뒤집어 쓰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죄인된 신부(교회)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 성경에 기록되어 복음이 설명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오직 예수님의 긍휼과 복음만을 설명하는데 이것을 대하는 바리새인과 제자들은 오직 행위(이혼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그것도 아니면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인가?)로만 고민하죠. 그런데 대부분의 현대 교회가 이런 인본주의 종교에 묶여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직 타고난 자만이 할 수있다.'라는 뜻은 예수님만이 가능하다라는 말이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잘 이해하셔야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신부로 다시 맞이하게 된 시점은 십자가 죽음, 즉 사역의 완성(다 이루심) 이 후 입니다. 즉,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점까지, 즉 예수님의 전 생애는 어떠한 신부도 맞이할 수 없는 상태(고자의 상태)였던 것이죠. 그런데 이 상태를 예수님 스스로 천국을 위해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 성경은 전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소재를 천지창조라고 하고, 성경의 스토리를 복음이라고 하며, 성경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성경에 없습니다. 즉, 나는 부인 되어져야 할 존재일 뿐입니다. 즉, 성경을 읽으면서 점점 없어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하나 있다면 주인공 예수님의 품에 '거듭난 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단, 이 자들의 소수이며 이 자들은 오직 '복음을 아는 자'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자들은 복음을 알기에 점점 본인이 사라져 가기를 원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신부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사라져 가셨죠. 희안하게 신랑과 신부는 닮아서 서로를 위해 사라져 가기를 원하죠. 이 땅에서 둘은 서로를 위해 점점 사라져 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이 '영적인 세상인 천국'의 방향에서 보면 점점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예수님께서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입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종말도 그렇고, 개인적인 종말도 그렇죠.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음을 받아 놓고 유예된 시간만 긍휼로 사는 것입니다. 길게 유예를 받은 사람도 기껏해야 80-90년입니다. 이 시간 안에 재판을 무효로 돌리셔야합니다. 재판의 댓가를 예수님께서 대신 치루셨다는 것을 알게 된 자가 되어야합니다. - 대부분의 사람은 이 시간에 자기의 행위로 합의를 노력하죠.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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