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0:29-34(22.01.12.수)

은혜바라기 2022. 1. 12. 08:28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떠나 갈 때에' 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계속 반복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맥 상 독자의 이해를 위해 괜히 끼어 넣은 말씀이 없습니다. 하물며 계속 반복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의 뜻은 뭘까요? 복음은 인본주의와의 분리가 그 출발이기 때문에 인본주에서 계속 분리(떠나감)시키는 것이 복음의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고 이것이 인본주의적으로 해석되는 자리에서 항상 떠나시는 것이죠. 

 그러나 잘 이해하셔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지 말자.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해지기'의 방향으로 나가지 말자. 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것을 복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복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알려 주셔야 하는 것이죠. 이 '앎'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자들은 소수입니다. 매우 적은 수의 사람이죠.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이 믿음으로 착각하며 신앙생활을 하죠. 성경은 그것 자체를 심판이라고 합니다. 

 

 큰 무리는 누구의 상징일까요? 나중에 힌트가 나오는데 '맹인을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라고 하죠. 이 무리는 선택받은 자가 복음을 깨닫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큰 무리는 인본주의 종교인입니다. 이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른다고 나오죠. 인본주의 종교인들도 예수를 따릅니다. 이게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을 쫓아 이 땅에서 잘살기를 쌓으려 하죠. 그래서 그들과 복음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대립이 됩니다. 복음에 있는 자는 '이 땅에서의 고난을 통해' 복음에 관해서 말을 하지만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말씀을 통해 이 땅에서 잘 살기'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포커스는 절대 마추어질 수가 없습니다. 

 맹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인본주의에 갖혀서 그것이 가리키는 복음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두 명이라고 하죠. 증인의 숫자입니다. 내 안에는 '옛 자아와 거듭난 자아' 두 명이 있죠. 그런데 거듭난 자아는 옛 자아가 맹인이라는 것을 알죠. 그래서 내가 나의 증인이 되죠. 즉,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증명하는 완벽한 증인이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 명 곧  증인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 '증인의 삶을 살아라' 라는 성경의 말씀은 전도하러 다녀라 혹은 신앙인 답게 살아라 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스스로가 증인이 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tv 뉴스를 보면서 '저런 xxx"라고 욕을 하면서 나는 안그래!' 가 아니라 tv를 보면서 내 안에도 저런 죄 요소가 있음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정확하게는 맹인이 있는 곳을 예수님이 선택하여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 때 소리질러 말하기를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죠.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당시 맹인들의 본심이 무엇인가를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본심은 그냥 '눈을 뜨고 잘 먹고 잘살기'를 바라는 것이겠죠. 그러나 이것을 이용하여 복음을 설명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개입되면서 이 말은 복음을 해석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즉, 이 장면과 이 기적은 이 당시 맹인을 위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선택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긍휼함이 구원의 모든 것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구원의 출발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이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죠.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에 갖혀 전혀 복음을 보지 못하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우리가 복음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를, 예수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기적과 이적을 베푸셨죠.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전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용도일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장 쉽고, 잘 설명할 수 있는 '눈을 뜨는 기적'을 제일 많이 하시죠. 7번 나옵니다.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죠. 나의 행위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위(은혜)가 구원의 핵심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후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눈을 뜬 이 후에 비소로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표현입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있게도 예수님은 눈을 뜨는 기적을 보이실 때 마다 매번 다른 방법을 쓰시죠. 그 이유는 인간이 방법론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단 한가지 방법만을 통해 눈을 뜨게 하셨다면 후대에 이 방법이 우상화가 되어서 기독교에 전해질 것입니다. 그것을 방지하셨던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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