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1:1-9(22.01.13.목)

은혜바라기 2022. 1. 13. 08:39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루살렘은 천국의 상징이죠.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가서' 라는 말은 천국 입성의 조건을 이야기하겠다는 암시입니다. 두 제자라는 말은 증인의 숫자 2와 교회를 뜻하죠. 그리고 맞은편 마을은 예수님과 맞은편이기 때문에 인본주의를 뜻합니다. 거기에 매여 있는 나귀는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라는 말은 결국 인본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오는 교회를 뜻합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 말은 맥락에서 벗어난 이상한 말입니다. 뜬금없이 아무한테나 '재산 내 놔라'하면 누가 그냥 줄까요? 그래서 스토리상 모순이 있죠. 불편합니다. 또한 이 말을 인본주의 종교적으로 해석하여 '주의 권능으로 말하면 무엇이든 얻어낼 수 있다.' 등의 처참한 해석을 하셔도 안됩니다. 이 말은 모순도 아니고 기적도 아닙니다. 이 말은 복음을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은 '이 나귀는 복음으로 해석 될 도구로 쓰여질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 복음으로 이용되다' 이렇게 동의어로 생각하셔야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대하는 3가지 관점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 세상사람들은 첫번째 해석을, 교회는 2번째 해석을 하죠  '눈을 떠야 합니다.')

 '시온 딸'에서 시온은 예수님이 사는 곳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시온'은 이 세상의 지도에 없는 곳이죠. 참성전을 뜻하는 숨겨진 왕국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결국은 천국을 말하겠죠. 이 곳의 딸이란 결국 교회를 말합니다. 즉, 구약에서  네 왕인 예수께서 너에게 임한다라는 말씀을 신약에서 예수님이 나귀 새끼 위에 타는 것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왜 ?

 아담(사람)이라는 히브리어를 파자하면 흙으로 만든 사람 혹은 피사람이란 뜻이 있습니다. 피사람은 다시 붉은사람으로 번역을 할수도 있죠. 이 붉은 사람 곧 붉은 짐승이 나귀의 또 다른 뜻입니다. 전부 연결이 되죠. 그런데 이렇게 글자를 파자하여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꼭 이렇게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더 쉽게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인본주의에 매여있는 죽은 자 곧 짐승이죠. 인본주의에 매여있기 때문에 본문에서 매인 나귀라는 표현이 나오죠. 이것을 풀어서 예수님께 가져오죠. 즉, 인본주의에서 벗어남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위에 타시고 천국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되시죠? (예수님이 말구유, 즉 짐승먹이통에서 태어나신 것은 바로 짐승인 우리의 먹이가 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피와 살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죠.)

 우리의 짐승됨이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탈 수 있는 그릇이 되죠. 즉,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보충 해석하는 말씀이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라는 구절이죠. 이것을 연결해서 설명하면, 예수님께서 거듭난 나와 한 몸이 되어서 천국에 입성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와 한 몸이 되신 것을 겸손하다고 하십니다. 

 교회에서 가장 착각하면서 쓰는 말이 '겸손'입니다. 교회에서 겸손한 척하는 행동들은 전부 '처세술'일 뿐 입니다. 인간은 절대 겸손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겸손은 예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겸손이란 예수님이 그 지위를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순종하여 짐승인 우리와 함께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항상 거부하는 오직 교만한 자일 뿐이죠. 

 그런데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죠. 그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행위라는 옷을 길에 펴죠. 그러나 그 옷은 예수님이 밟고 지나가죠. 같은 옷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옷이 아니면 전부 심판입니다.  

 이 무리가 외치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 말이 매우 좋은 말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호산나'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높은 곳에서 나를 구원해달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기들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달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인본주의 바벨탑과 같은 의미의 해석입니다. 이것을 연결하여 해석해보면 '예수님을 찬양하는데 그 이유는 나를 그 높은 곳으로 올려서 더 잘살게 해 주세요!' 라는 말입니다. 지금 교회 신도들의 대부분의 신앙이 아닐까 싶네요.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말을 복음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높으신 예수님의 구원'으로 알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은 항상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겉옷과 속옷, 오른 뺨과 왼 뺨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죠. 그래서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속옷를 달라고 하면 컽옷까지 주는 기부정신, 오른 뺨을 치면 왼 뺨을 갖다 대는 인내심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복음에 눈을 뜬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누가 말씀의 논리적, 종교적, 인과율적 해석을 원할 때 그것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진짜 복음을 해석해 줘야 하고 그것은 오직 성령께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뜻'인 것을 알게 되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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