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복음으로 사는 삶이란 철저하게 '인본주의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신본주의'로 창조되었지만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인본주의에 묶여 버렸죠. 즉, 기준이 바뀐 것입니다. 이 기준이 바뀐 과정을 묘사한 부분이 '선악과 에피소드'입니다. (결국 모든 신앙은 '기준' 싸움입니다.)
즉, 결론적으로는 '선악과를 먹어서 죄를 지었다.'라고 우리는 배워 왔지만 사실은 이 선악과 에피소드는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는 과정을 시청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창세기의 선악과 에피소드를 한번 읽어 보세요. 전혀 다르게 다가 올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분리된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은 모두 영적으로 완벽하게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완벽하게 죽은 자에게 '무엇을 하면 용서해 줄께'라는 말은 모순이 되죠. 그래서 오직 살아계신 한 분인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이루신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사건이 발생 될 것을 몰랐을까요? 아셨겠죠.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큰 섭리로 이해하면, 이 선악과 사건 조차 복음의 일부입니다.(이 에피소드에 나오는 사탄 조차도 복음의 개연성에 필요한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즉, 내가 완전히 영적으로 죽은 자여야만 예수님의 필요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복음의 본질을 발견하셔야합니다. 즉, 하나님이 만드시는 진짜 창조는 창세기 1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진짜 창조는 사실 지금 진행중입니다. 즉, 예수님이 그 분의 신부를 사랑이라는 복음으로 택하여 품에 넣는 것. 바로 이것을 구원이라고 일컫지만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진짜 창조 즉, 새로운 피조물을 완성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 이 과정이 끝나는 것이 진짜 '안식일(천국)'이고 이 안식일이 바로 예수님 자체 입니다.--성경은 모두 이것을 통일성 있게 설명하는 것이구요. -- 창세기1장의 7일 창조 과정은 이 진짜 창조를 설명하는 과정입니다.-- 물론 상상의 설명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창조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의 사실이 진짜 실체의 세상인 영적에서 보면 상징이라는 것이죠. 어렵죠? )
물론 선택되지 않은 사람도 복음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하물며 세상 사람들도 세상의 이치 속에서 복음의 논리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코끼리의 한쪽 다리만 보는 듯이) 그 이유가 이 세상은 하나님이 통일성있게 복음을 설명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중 어떤 일부 규칙을 발견한 것이죠.
그러나 복음의 목표인 예수님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영지주의' 혹은 '율법(행위)주의'로 빠지게 되고, 세상사람들은 '허무주의' 나 '염세주의'로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허무,염세주의를 엿본 사람들은 매우 우울하게 되죠. 그리고 허우적 거리다가 또 다른 방향의 인본주의를 찾아 떠납니다. 이것을 스스로는 치료되었다고 착각하죠. 그런데 또 다른 방향의 인본주의 조차 찾지 못한 자들은 결국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죠.
모든 인류 역사는 이렇게 또 다른 인본주의 목표를 찾는 노력의 역사입니다.이 대표적인 것이 '정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정치를 계속 무너트리시죠. 그 속에 '답 없다' 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것, 민주주의(주민이 주인인데)가 아래로 부터 아우성 치는 것, 믿었던 대통령이 감옥에 가는 것, 전부 다 메시지 입니다. 하나님은 인본주의에 의해 쌓아지는 어떠한 것도 전부 바벨탑으로 인식하시고 결국 무너트리십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성령께서 오셔서 이들에게 예수님이라는 진정한 목표를 가르쳐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자들도 결국 이러한 과정을 전부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과 저들의 차이는 결국 '은혜'를 받았는가? 아닌가? 의 차이죠.
복음의 진영에 들어온 사람은 예수님이 항상 나를 잡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알려 주시죠. 그들은 인본주의라는 절벽에서 떨어지지만 그로 인해서 나를 잡고 있는 예수님의 손을 더 꽉 잡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손에 붙잡혀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절벽(인생)을 대하는 차이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여기서 건축자란 작게는 유대인들이요. 크게는 인간 전부입니다. 또한 '나'이기도 하죠. 내가 버린, 내가 죽인 예수님(십자가)이 모퉁이로 가셔서 오히려 머릿돌이 되신 것이죠. 즉, 천국의 초석이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은 이 섭리를 기이하다 여긴다고 하셨죠. 즉, 복음이 그들의 논리로 이해하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한계로 인해서 어느 순간 목표를 보지 못하고 '교회의 규칙'이라는 신앙의 틀에 자신을 묶어 버리죠.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모든 자들, 즉, 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 즉 기독교 종교를 가진 자들은 전부 그 나라를 빼앗긴다고 합니다. 그들의 행위나 노력으로 절대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러나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자, 여기서 열매란 예수님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을 맺는 자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다시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가서 기준이 나로부터 예수님으로 바뀐다는 것이죠. (모퉁이 돌은 기준에서 벗어난 돌을 뜻하고, 머릿돌은 다시 기준이 되어 돌아온 돌을 뜻합니다. )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든다고 하죠. 이것도 결국 기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직 기준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준이 되어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이용하는 모든 것은 전부 다 깨져버린다고 하죠. 오직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 나머지를 다 깨 버린다는 말입니다.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라는 말도 결국 자신들은 인본주의 종교인이라는 고백입니다. 재미있게도, 인본주의 종교에 묶여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죽이려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인본주의 종교의 관점 때문에 예수님이 선지자의 행위를 보이므로 그 분을 잡는 것을 무서워하죠. 즉, 모든 기준이 '인본주의 종교'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땅의 인본주의에 묶여있는 것을 '땅 지 묶일 옥'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죽음'이후에는 결코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없죠. 그래서 '영원'이라는 영적 언어를 더하여 '영원한 지옥'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반대로 '영원한 천국'이라는 표현도 있죠.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를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