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2:15-22(22.01.25.화)

은혜바라기 2022. 1. 25. 08:26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인본주의 종교인과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간 자들은 어떤 시각의 차이가 있을까요?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영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기준으로 나를 보죠. 나를 객관화 시켜 두고 예수님의 눈이 되어서 나를 바라 보면 자기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요? 검죠. 무익하죠. 죄 덩어리죠. 죽은 자죠. 이 방향을 유지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보세요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도 없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이 악하다고 하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고 있어도(그것이 참이던 거짓이던 상관없이) 그 의도와 방향이 잘못된 경우 그것을 악하다고 합니다. 선과 악은 우리의 행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방향에 의하여 결정되죠. 우리의 방향이 예수님께 있을 때 그것을 선이라고 합니다. 

 데나리온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고 묻죠. 그 형상은 가이사의 형상이었죠. 그러니 가이사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상한 말씀을 하시죠. 갑자기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시죠. 이 말씀을 가지고 지금의 교회들은 나라에 내는 세금과 교회에 내는 헌금을 구분하는 교훈으로 가르칩니다. 엉터리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은 바 되었다고 하죠. 그러므로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돈이 가이사의 것인 것 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세금문제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이용하여 복음을 이야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완벽한 지혜 아닙니까?

 

 성경의 주제는 '복음' 단 한가지이며 매우 단순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두꺼운 이유는 '인간의 다양한 죄의 상태'를 먼저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말씀으로 나의 상태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들 처럼 매일 매일 말씀을 가지고 묵상을 해야 하죠. 늘 묵상이 말하는 바는 '복음' 한가지 뿐입니다. 읽다 보면 '또 같은 이야기네~~'라고 흐르죠.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런 묵상의 기능은 계속 나의 마음을 환기 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창문을 수시로 열어서 집 안의 나쁜 공기를 환기 시키는 것이죠. 그 때 창문을 열면서 '또~~~ 똑같은 공기만 들어올 뿐이네~~!! 좀 색다른 공기 없나~~'이런 분은 없겠죠.

 

"신명기 6장 8절: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신명기 11장 18절: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재미있게도 유대인은 진짜로 말씀을 써서 이마에 붙이고 다니죠. 묵상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이해하신 분들은 없죠? 아뇨 우리는 다 이러고 다니는 중입니다. 십일조를 통해 '죄인(10) 중의 대표(1) 의인 예수님을 드려 죄를 씻음'을 알게 하였더니 십일조만 드립다 내고 있고, 안식일을 주어서 '구원에 관해서는 너희가 할 일이 없으니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쉼'을 가르쳤더니 일요일을 성스러운 안식일로 바꾸어서 목숨걸고 일요일이나 지키고 있죠. 모든 교회 신앙활동은 다 이렇습니다.(예수님에서 벗어난 신앙생활은 이렇게 웃긴 것 뿐 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이 이마에 말씀을 붙이고 다니는 이유가 그것을 보면서 그 모습이 지금 나의 어리석은 모습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유대인은 타산지석으로써의 복음의 도구인 셈이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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