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부분이 십계명의 1-5계명이며 첫째 계명입니다. 구약에서 이 1-5계명까지 하나님께서 계명 뒤에 설명을 따로 해주십니다. 그런데 6계명부터는 설명이 없죠.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6계명부터 산상수훈에서 설명을 하시죠. 구약의 하나님의 설명과 신약의 예수님의 설명이 연결되는 장면을 연출하시죠. 시간적으로는 매우 큰 간격이 있지만 시간이 없는 영적 세상의 측면에서 보면 성부, 성자 하나님께서 1~10계명을 쭉~~욱~~~ 연결해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죠.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10계명은 10가지 종류의 계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10이란 완전수를 뜻합니다. 즉, 율법, 곧 말씀은 완전한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사실 613가지나 됩니다. 확장 개념으로는 2134가지나 되죠. 이런 율법이 완전하다는 것을 표현하시기 위해 구약의 하나님께서 완전수 10에 마추어서 표현하신 것 뿐 입니다 .
똑 같은 방식으로 신약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율법을 다시 2개로 표현하셨죠. 2라는 숫자는 증거의 숫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말씀을 증거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자체도 두개의 나무를 연결해서 만들었죠. 말씀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한분 예수님이 다 이루셨죠. 성경에서 1(한분)은 오직 하나님만 쓸 수 있는 숫자입니다. 유일신이라는 뜻이죠.
위에서 말한 첫째되는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라' 와 두번째인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 두가지 계명이 십계명, 즉 모든 율법과 같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보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이 실체가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결국 우리는 이 두 계명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이 두 계명을 지켜내신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알게 된 것)을 복음이라고 하죠.
그러나 구약에서 보면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율법을 어떻하든 행위로 잘 지켜내려고 했죠. 똑같이 지금의 기독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행위를 노력해서 크리스찬의 위치를 고수하려고 하죠. 똑같은 역사의 반복입니다. 그 때의 바리새인도 자신들이 독사의 자식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지금의 크리스찬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기준 자체가 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죠.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이니까 노력 할 필요가 없다는 방향성을 갖게 되면 영지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말씀은 인간에게 주신 것이 맞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성실히, 열심히, 진지하게 지켜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을 해 봐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필요성을 알게 되죠. 그런데 그 과정 자체를 생략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필요성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단지 인본주의 신으로 믿는 것 뿐입니다.
성실히, 열심히, 진지하게 지키라는 말씀은 인간이 지켜 낼 만한 교회의 규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외식이라고 하죠. 말씀은 이렇게 쉽게 지켜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 간음" 말씀을 성실히, 열심히, 진지하게 지키라는 것은 이렇게 말씀의 본질 깊은 곳 까지 들여다 보고 그 길을 걸으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깊이, 성실히, 열심히 들여다 본 만큼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뚜렷하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행위가 아닌 마음의 중심의 문제 입니다.-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죠. ) 오늘의 묵상은 어렵지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싫어하는 간증을 잠깐 예로 들어볼께요.
(( 제가 20살 초반에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 어떤 '거지 아저씨'가 매일 그 곳에서 동량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겉옷을 벗어주라'는 말씀이 생각나더군요. 그래서 실천을 해볼까 갈등을 했습니다. 결국 하지 못했죠. 그 이유가 이 옷을 벗어 주어도 다시 내일은 오게 되는데 그 때는 바지를 벗어 주고 다음 날은 속옷도 벗어 주어야 하는가? 맨붕이 왔죠. 갈등과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이 모순되는가? 아니면 인간이 모순되는가? 갈등을 하게 되었죠. 이 갈등을 몇 년, 몇 십년을 했습니다. 참 우습죠? 재미있게도 이 갈등이 기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갈등의 유발과 진행이 성령께서 하신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이 갈등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었죠. ))
위의 간증에서 나온 문제를 아주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이 지켜 낼 만한 규칙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외식이라고 하죠. 즉, 하루에 100원짜리 동전 한개씩 거지 아저씨에게 던져주는 것이죠. 그것을 365일 하루도 빼먹지 않고 달성하면 그 사람은 완벽하게 '예수님을 잃어 버립니다.' 휼륭한 사람이 되어 버리죠.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이 필요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휼륭해지는 만큼 십자가의 필요성이 없어지죠. 인본주의 종교관(인본주의 기독교와 모든 타 종교 전부)과 참기독교는 완벽하게 반대로 가죠?
빨리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을 믿게 되는 출발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무익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죠.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고 그래서 애통하고, 갈등하고, 고민하는 자가 되죠. 그런데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만이 할 수 있었구나!" 라는 방향성을 갖게 됩니다. 이때 받는 위로를 평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방향이 바뀌는 것을 거듭난다고 하죠. ( 시간의 흐름이 없는 묵시 속에서의 거듭남은 이미 태초에 이루어지죠. 즉, 내가 염소에서 양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양으로 정해져 있는 내가 눈을 뜨는 것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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