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2:41-46(22.01.28.금)

은혜바라기 2022. 1. 28. 09:16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복음의 눈으로 볼 때에만 하나님이 의도하신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말씀은 이것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에게 묻는다'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분명히 인본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잘못된 대답을 할 것을 알고 유도하시는 것이죠. 그들의 잘못 된 대답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시려는 것이 예수님의 진짜 의도입니다. 즉, 복음의 눈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성경을 볼 때 어떠한 한계를 가지고 보는가! 에 대한 주제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라고 묻자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하죠. 그리스도는 그들이 가장 위대하다고 믿는 다윗의 핏줄, 즉 자손으로 올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복음의 눈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장 믿고 있는 역사적 인물과 그 핏줄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혈과 육, 즉 핏줄이라는 인간 세상의 가장 강력한 관계로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의 가장 강력한 관계 중심'을 다른 말로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보다 먼저 계신 분이죠.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예언한 이유는 다윗이 예수님의 모형, 즉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즉, 상징으로 실체를 설명하고 그 상징이 가리키는 실체가 실제로 등장하는 방식을 사용한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것이죠.

 

 그런데 바리새인은 '다윗이 믿음직하기 때문에 그의 자손도 그러할 것이다.' 라는 잘못된 인본주의 기준을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니다. 예수님이 먼저며 기준이며 목표다. 다윗은 그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었다.'를 설명하고 계시는 중이죠. 

 

 "시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

  오늘 인용된 시편입니다. 참 재미있죠?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주로 섬기는 그 당시 인간 세상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제쳐두고 다른 '주'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 다른 '주'께 말씀과 같은 영광을 주시는 장면이 나오죠. 당연히 여기서 나오는 '내 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기 때문에 아직 이 세상에 소개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예수님의 실체를 알았을까요? 

 

 이 장면을 통해서 결국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나 계셨던 것이죠. 즉,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라면 태초에 굴러다니는 돌맹이 한개를 보면서도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2천년전에 실체화 된 이유는 바로 성경의 완성, 즉 말씀의 완성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2천년 전에 완성되었지만 영적으로는 태초 아담의 순간 부터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까지 매 순간 순간 완성되시는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주면서 같이 먹자고 할 때 아담이 '그냥 먹죠.' 이것을 보고 너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나요? 당시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그 분이 늘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지금의 인간과 다르게 훼손되지 않은 지혜, 도덕성, 능력등을 가진 완벽한 인간으로써 태초에 지음받은 상태 그대로 입니다. 또한 원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입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죠. 그런데 고민도, 갈등도 없이 바로 선악과를 먹게 됩니다. 너무 너무 이상하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아담이 바로 예수님(상징)입니다. 만약 여기서 아담이 '난 안먹어'라고 하면, 복음도, 성경도, 여자(교회)도 없이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여자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아담 십자가라고 할 수 있죠. 그 이유는 바로 "난 죽어서 여자(교회)와 같이 있는 것을 선택하겠다.(되 찾겠다.)"입니다.

 

 그런데 하와는 왜 바로 사탄의 꾀임에 넘어갔을까? 하와는 사실 조금 다른 존재입니다. 하와는 본질이 특이한 존재입니다. 하와의 본질은 오직 아담의 갈비뼈라는 것 뿐이죠. 즉, 아담이 존재 할 때에만 존재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잠깐 생략된 것 같이 표현 된 창조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조차도 하나님이 의도한 창조적 섭리입니다. 그래야 복음이 시작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여자를 위해 죽고,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죽는 '사랑'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정의는 '복음'입니다. 

 

 너무 길어져서 여기까지만 묵상을 할께요. 사실 이 부분을 묵상하려 하면 책 한권이 나올 것 같네요. 복음의 눈으로 보면 너무 너무 감동스러운 부분이 많은 부분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보면 '첫째 아담, 둘째 아담' 이런 식으로 언급이 되어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정말 성경은 놀랍지 않나요? 그런데 이런 놀람, 이런 감동은 늘 이 부분에서 갈등했던 자, 배고팠던 자, 모순되었던 자, 답답했던 자, 마음이 가난 했던 자들이 그것을 알게 될 때만 느낄 수 있죠. 절대로 ' 교회에서  칭찬 받는 휼륭한 성도'가 휼륭한 봉사와 헌금을 쌓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그 당시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했던 질문을 여러분에게 해 보겠습니다.  "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입니까? " 

 

  답 : 하나님의 자손 (하나님)

 

 구정 설 잘 보내십시오. 수요일인 2월2일까지는 연휴이므로 묵상 포스팅도 쉬겠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 인본주의자 : 세상 복 많이 받아서 잘사세요. ~~~   복음의 눈으로 읽는 자 : 인생을 복음으로 더 많이 해석하세요. ) 이렇게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축복도 사람에 따라 두 길로 갈라집니다. 2월 3일에 뵙겠습니다.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를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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