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모세의 자리'란 율법을 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율법의 존재목적은 우리가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데 있죠. 그래서 우리가 죄인이고 능력없음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죠. 그래서 이 복음을 알게 되는 과정의 출발이 바로 율법입니다. 안 믿는 자들에게는 양심이 그 역활을 하게 되죠. ( 그래서 신기하게도 세상 사람들도 양심에 어긋난 행위를 하면서 외부를 인식합니다. 이 외부가 어떤 자들에게는 하늘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cctv가 되기도 하고, 어떤 자들은 옆에 있는 담장에 나 있는 구멍이 되기도 하죠. )
"롬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이 롬11:32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가르치는 바는 이 구절에서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즉, '휼륭한 신앙 생활 잘하기'를 노력하여 그것을 통하여 타인과 나 스스로에게 칭찬받기를 원하죠. 더 나아가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즉, 지금의 교회는 그 목적에서 많이 벗어나 있죠. 율법을 주니 그것을 지키는 것에 묶여 버렸죠. 즉, 행위에 묶여 버린 것입니다. 이 행위의 본 모습을 그 다음절부터 예수님께서 고발하시죠.
서기관들과 바래새인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실제 행하지 아니한다고 하죠. 정확히는 못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남에게 짐을 지우는 것으로 표현하셨네요. 나쁜놈들이죠. 그런데 이것은 바리새인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확하게는 지금의 교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인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려고 하니 결국 한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죠. 즉, 한손가락의 움직임 만큼의 순종도 하지 못함을 고발하고 계신 것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일단 한 호흡 쉬죠. == 이 묵상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일단 바리새인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처럼 타락한 기독교 지도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시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2번 이상 평생 금식했고 그 돈을 모아서 고아와 과부를 도왔으며 성전을 지키려고 목숨을 버린 자들입니다. 즉, 지금 현대에 존경받는 어떤 지도자들보다도 더 휼륭한 인격적, 신앙적 기독교 지도자들이라는 사실을 밑에 깔고 이 묵상을 하셔야 합니다. 제가 한 호흡을 쉬자고 한 이유는 오늘 말씀을 읽다 보면 바라새인을 나쁜 지도자로 지정해 놓고 그 나쁜 행위를 규탄하는 방향성의 묵상으로 흐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리새인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가장 휼륭한 크리스챤'으로 규정을 해 놓고 묵상을 다시 시작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휼륭한 신앙인의 모습의 본질을 이렇게 고발하시죠.
"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
즉, 이런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 묵상의 촛점을 잘 맞추세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 수록 반듯이 이런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 지도자는 이것을 계속 경계시키는 역활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현대 교회 생활에 대입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모든 신앙생활을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내가 나를 인정하고 싶은 욕구가 더 큰 사람이다. 새벽에 기도하는 시간도 남들의 눈을 살피게 되고 주일성수하는 것도 남들에게 성실함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헌금을 내면서도 늘 교회와 내 자신을 의식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한 자리 맡아서 집사, 권사, 장로가 되어서 남들에게 휼륭한 봉사자라는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의 정점을 이른 자들을 목사라고 하고 이들은 사명감이라는 말로 사역을 포장하며 늘 강대상에 오릅니다. 목사들은 모두 100% 위선자들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인지하셔야 합니다. 다시 한번 되새겨 보세요. '목사, 특히 휼륭한 인격과 신앙을 가진 목사일수록 무조건 위선자다.' 다시 한번 묵상의 촛점을 잘 마추겠습니다. 오늘 묵상은 넋 놓고 따라 오시면 샛길로 빠집니다.
그러니 '목사는 다른 사람 보다 죽일 놈'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휼륭하다고 생각하는 그 신앙생활 전부가 다 위선이라는 자리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에요. 즉, 이렇게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예수님께서 고발하시는 내용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늘은 율법의 역활인 고발자의 위치가 된 것이죠. 여기서 이제 둘로 갈라집니다. 유기된자, 즉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이 말씀을 부정합니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혹은 '난 안그래. 그런 사람과 같지 않다. '라고 말하죠.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이 고발이 바로 '나'인 것을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부끄러워서 쥐구멍을 찾게 되죠. 그 쥐구멍에 들어가서 오직 '빛'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 빛을 하나님의 긍휼, 즉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복음을 정확하게 아는 목사는 자신이 위선을 떨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격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죠. 즉 자신의 인격과 모든 지식이 배설물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런데 이것은 목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크리스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빌3:7-10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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