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3:8-12(22.02.07.월)

은혜바라기 2022. 2. 7. 09:51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성경의 주인공으로 보는 시점을 가지고 계셔야 복음이 이해가 됩니다. 잘 따라오세요. (물론 그렇다고 예수님과 나를 분리시켜서도 안됩니다. 내가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 예수님의 눈으로 죄된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견인하시는 것입니다. 즉, 선택받은 자들만 알 수 있고 볼 수 있죠. )

 '너희는 랍비라 칭함 받지 말라. 선생은 하나' 라고 하시죠. 조금 뒤에서는 '지도자라 칭함받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죄가 됩니다. 

 

 일단 죄의 정의부터 해결이 되어야 이 말이 이해가 되겠죠.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죄들, 곧 살인, 거짓말, 절도, 간음등은 죄라기 보다는 죄의 증상입니다. 우리는 기침과 콧물을 통하여 병든 것을 알게 되죠. 그것이 감기일 수도 있고 폐암일 수도 있겠죠. 이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죄의 증상들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죄의 참 실체는 바로 신본주의, 즉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인간 중심, 즉 인본주의입니다.(이것을 최초에 단계적으로 표현한 것이 선악과 사건입니다.) 그렇게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인간은 스스로가 기준이 되어 타인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다고 여기죠. 현대 교회의 목사가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묵상을 통해 복음을 전달하고 있는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도행전 전체가 바로 이 싸움을 하는 성경책입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그들의 최고 지도자들인 사도들의 행전이죠. 그들은 늘 복음을 훼방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것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모습으로 그려내죠. 이 두 가지 큰 물결을 동시에 볼 수 있을 때 사도행전은 완전한 복음서가 됩니다. 물론 때로는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시기도 하시죠. 어렵죠? 그러면 이해를 돕기 위해 한가지 에피소드를 살펴볼까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오직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베드로가 일어나서 '12제자 중에 한자리가 비워 있으니(가룟유다의 죽음으로 인한 공석) 우리가 제비뽑기를 해서 12제자(사도)를 채우자'고 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매우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가 발생한 시간을 잘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에피소드를 정확하게 성령강림 직전에 배치하셨죠. 즉, 성령의 인도하심과 전혀 상관없이 사람이 교회를 지도하고 가르칠 때 벌어질 만한 어리석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 때 뽑힌 맛디아는 이 후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역활없음) 또한 나중에 이 12제자의 공석을 예수님이 직접 바울로 채워 넣으시죠. 베드로의 어리석음이 다시 밝혀진 것입니다. 또한 이 에피소드 자체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 동원됩니다. 즉, '제비뽑기' 입니다. 이제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잘 들으세요. 

 

 구약에서도 제비뽑기가 있었습니다. 물론 구약의 제비뽑기도 인간의 어리석음의 일환입니다. 단지 이 어리석은 행동양식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설명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 뿐이죠. 즉, 제비뽑기는 인간의 의도(기준)가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을 전달하는 복음의 속성을 설명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제비뽑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신약은 성령께서 견인하여 성도를 이끄는 시대입니다. 즉, 성령께서 복음을 가르치시고 그것을 알게된 성도는 복음을 기준으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로운 길을 걷게 되죠. 예수님은 이것을 바라신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최우선으로 기다리라는 지시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이러한 어리석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냈죠. 성령강림 직전에 이 에피소드를 위치시켜 인간 지도자의 어리석음을 고발하고 계신 하나님의 윗트가 보이십니까? 그런데 현대 교회는 이 '제비뽑기'를 매년 12월31일 24시에 하곤 하죠. 말씀을 제비뽑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가르치는 목사나, 뽑은 말씀 한 개를 부여잡고 부적처럼 간직하는 성도나, 이 둘의 모습과 어리석은 베드로의 모습은 매 일반입니다. 우리는 매년 신년 때마다 교회라는 무당집에 갔다 온 것입니다. 

 

 신약 이후 우리를 가르치는 유일한 분은 오직 성령님입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께서 가르치는 것은 정확하게 3가지 입니다.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 말씀이 무엇인가는 너무 중요하지만 묵상이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하겠습니다.-그리고 우리가 아는 '설교'라는 히브리 어원이 바로 '책망'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다 형제니라' 이 말은 '너희는 모두 같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결코 나와 타인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본주의 기독교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내가 잘 지켜서 남을 위해 봉사하라'로 가르치죠. 이것 자체가 나와 남을 가르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 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다 가르치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남은 바로 나입니다. 남은 객관화된 나입니다. 즉, 죄된 나를 내가 보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남을 만들어서 그들의 죄를 통해 나를 보게 하신 것이죠. 즉, 남은 거울의 역활입니다. 우리가 남의 죄를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내 중심에 그 죄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죄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내 마음속에 간음이라는 죄가 없다면 타인이 간음을 할 때 그게 간음인지 아닌지 나는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경은 예수님과 나의 관계만을 이야기합니다.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하라는 것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하나님의 원수된 나를 예수님이 온전히 사랑하신 것을 말하죠. 

 
 이 땅에 있는 부모와 나의 관계도 정확하게 말하면 실체가 아닙니다. 이 땅의 부모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몇 십년에 한정된 시스템입니다. 오직 성경은 복음만 이야기하며 그 복음은 오직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을 이야기하죠. 십계명의 제5계명이 바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한 계명입니다. 이것을 이 땅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잠시 만들어 놓으신 후 우리가 얼마나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죄인인지를 알게 하여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묵상하게 하신 것이죠. 

 마지막 말씀은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죠. 여기서 큰 자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우리를 섬긴다고 하죠. 즉, 십자가로 우리를 섬기신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세족식'이라는 에피소드로 더 자세하게 설명하셨죠. 그러나 현대 교회는 이 말씀도 '겸손한 사람이 되는 처세술'로 이용하죠. 이 처세술이 교회에서 매우 잘 먹힙니다. 모두에게 겸손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고 결국 장로와 권사의 작은 지도자 자리까지 올라가죠. 오늘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시각을 환기시켜드립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렇게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전부 다 이런 방향성에 놓여 있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어떠한 소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되는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인본주의 기준은 정말 끔직할 정도로 우리를 잡아 당기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지 않으면 어떠한 단계에서도 다시 인본주의 기준으로 말씀을 보게 되죠. 이것을 경계하고 당부하시는 말씀이 바로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 이것도 우리가 '늘 깨어 있도록 노력하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깨어 있도록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말이죠. 즉, 적극적 수동태입니다. 정말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죠??- 그래서 성경은 절대 인간이 인간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 저의 이 묵상도 더 넓은 복음의 길을 묵상한 분이 뒤돌아 보면 아마 몇 천군데의 모순이 보일 것입니다. 단, 그 분이나 저나 그리고 이글을 읽는 선택된 분이나 공통점은 바로 '방향성'입니다. 정확하게 예수님이라는 '길(방향성)'에 들어 와 있죠.  )

 

 그래서 예수님은 정반대의 말씀으로 오늘의 말씀을 이끄시죠. '자기를 높이는 자'는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나의 옛자아입니다. 그 옛자아는 결국 낮아진다고 하죠. 지옥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하나님이 본체를 비우시고 죄인된 몸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자기를 낮출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그 분만이 가장 높아진다는 말씀으로 오늘의 말씀을 끝내십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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