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없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정확하게 '외식하는 것'이 뭘까요?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의 상태를 정확하게 확인하라고 주신 일종의 '측정도구'입니다. 즉, '너희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하니 율법을 주마! 지킬 수 있는지 테스트 해 보렴' 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결론은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먼지같은 존재였군요. 우리는 죄인입니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단 한가지의 율법도 지킬 수가 없으면서 지키는 흉내만 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죠.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들은 스스로 어느정도 율법을 이행 하고 있고 노력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이유는 바로 율법의 기준을 하나님의 기준에서 인간의 기준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지킬 만한 수준으로 떨어뜨려 놓은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의 기준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마음속에 품기만 해도 간음, 형제를 미워만 해도 살인 등등)
외식하는 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죠.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교회에서 되고 싶고, 닮고 싶고, 목표로 하는 크리스찬을 상징합니다. 많은 교회의 설교들이 주일성도로 살지 말고 교회 밖에서도 크리스찬 답게 살라고 가르치죠. 그러나 우리는 절대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에서는 그것을 알려주고 애통하고 낙심한 자들에게 복음을 알려주는 역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본질적 죄인인 것을 알게 되면 그때서야 비소서 '예수님의 절대 필요성'이 보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천국 문' 혹은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외식을 하면, 즉 '이 정도면 최선이야', 혹은 '나는 할 수 있는 만큼은 했어' 혹은 '나는 저 사람보다는 좀 더 괜찮아' 라는 외식으로 결론맺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이 천국문을 막는 것이 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타인에게 가르치는 자이므로 결국 타인들이 가려는 천국문을 막는 꼴이 되죠. 이들은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지만 그 노력이 외식으로 사로잡혀 그 교인을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하죠. 무서운 말입니다.
'눈 먼 인도자'란 복음을 보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복음이란 복된 소식입니다. 합당한 소식의 수준을 벗어난 엄청난 행운을 뜻합니다. 합당한 소식이란 내가 노력한 만큼 합리적으로 내가 가져가는 것을 뜻하겠죠. 그러나 복음이란 일하지도 않고 천국을 얻는 행운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들이 어떠한 죄값도 치루지 않고 천국을 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의 핵심은 당연히 예수님이죠.
"롬4:5-8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니라' 하죠. 여기서 '성전'과 '금'이 과연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전'이란 무엇일까?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말하죠.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장소에 묶여 계신 분이 아닙니다.
"행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성전을 허락하셨죠. 즉, 성전을 통해 무엇을 상징하고,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실제로 성전에 묶여 계시는 분은 아니지만 '성전에 내가 존재한다고 해 줄께. 왜냐하면 이런 성전이 가리키는 진짜 실체를 이 땅에 보낼 예정이므로 이 보이는 성전을 통해 그 실체를 깨달으려므나~~'라는 뜻이죠. 당연히 성전의 실체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 예수님으로 오셨죠. 즉, 예수님은 '나'로 오신 분입니다. 고로 성전은 바로 '나' 혹은 '선택받은 자들 전부'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예수님도 되고 나(혹은 선택받은 자들 전부)도 되죠.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되는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는 말도 맞고 우리가 성전되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도 맞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과 우리가 한 몸이라는 시각이 없으면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그럼 '금'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금'이란 우리가 드려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가치와 노력을 뜻합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우리의 노력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생각하죠. 이것을 다음 구절에서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죽은 자라는 사실을 계속 드러냅니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다 더럽다고 하죠. 우리의 어떠한 노력도 가치도 무가치한 죽은 것이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오는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성실과 열심으로 포장하면 하나님께서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만 받으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오직 선하신 분만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인해 이것이 믿어지게 되면 우리도 그 영향력속에 들어가 선한 구역인 성전에 정착하게 되죠. 여기에 우리의 노력은 한푼도 끼지 못합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하고 이것을 '다행이다'라고 느끼는 사람이 ' 참 평강'을 느끼게 되죠.
그래서 외식하는 자들, 즉 인본주의 종교인은 '성전보다 금이 더 가치 있다.'라는 '고급 철학'을 사용한 것입니다. 좀 어렵죠? 쉽게 풀어 드리죠. 유대인이라면 그 누구나 금보다는 성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들의 인본주의 철학으로 뒤집은 것입니다. 즉, 성전은 그들이 노력을 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노력없이 그 자리에 그냥 있었던 것이고 금이란 나의 노력, 즉 나의 가치가 들어간 것이므로 나의 노력과 가치가 들어 있는 금으로 하나님께 맹세한 것이 더 지킬만한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더 높은 신앙의 잣대로 뒤집어 버리신 것입니다. 즉, 금이라는 가치가 성전에 들어와서 가치가 있게 된 이유는 이 성전이 그 금을 가치 있다고 여겨 주고 받아 주기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 금의 가치 보다 성전의 가치가 훨씬 크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죠. 즉, 반전의 반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반전이 있습니다. 즉, 이것은 성전과 금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전과 금은 상징일 뿐이며, 또한 예수님이 이것을 가르쳐주는 자들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바로 이 글을 읽는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똥가치인 우리를 받아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보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성전이 아니냐?'라는 말이 이제 이해가 되시죠?
우리는 예수님의 품 안에 있을 때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밖에서는 우리의 가치는 그냥 '죽은 자'입니다.
오늘의 결론은 에스겔 37장으로 대신합니다.
"겔27:1-5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이제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셔야 합니다. 나는 에스겔 골짜기의 죽은 뼈입니다. 이 고백이 나오셔야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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