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항상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빠지지 말아야 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을 지키라고 주어진 책이지만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켜서 복음을 우리에게 주는 책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와 상관없는 책도 아닙니다. 만약 우리와 상관없는 책이라는 방향으로 생각하면 영지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어렵죠? 아브라함을 잠시 생각해 보죠.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을 잘 설명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드는 가정에서 태어났죠. 즉, 완벽하게 하나님과 분리된 자, 즉 영적으로 완벽하게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어 믿음을 가지게 되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기근이 오면 하나님이 가라는 곳으로 가지 않고 애굽으로 도망가죠. 그리고 그곳에서 왕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까봐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왕에게 누이를 넘겨주기까지 합니다. 찌찔한 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닌 그 왕을 혼내죠. 그 이유는 두가지 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아브라함을 예수님의 역활로, 아내를 교회의 역활로 활용하신 것입니다. 즉, 절대 교회는 예수님의 곁을 떠날 수가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또한 당시 애굽의 왕은 인간세상 최고의 권력자이죠. 즉, 인본주의 꼭대기를 상징합니다. 그런 인본주의 꼭대기도 하나님의 말 한마디면 꼼짝 못한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게 되죠. 이렇게 그는 한 눈끔씩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알게 됨'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믿음은 대부분 '덮어놓고 믿자'죠. 즉 '내가 믿어 보자'죠. 이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
아브라함은 바로 우리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그 자들의 전 인생을 통해서 한 눈끔씩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인생을 살아야 하고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최선을 다해도 우리는 인생을 통해서 행복(구원)을 얻을 수가 없고 최선을 다해도 우리는 단 한가지 말씀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방향성을 가지고 오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고급 식재료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십일조의 물품으로 율법으로 정한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십일조라는 율법을 만드신 이유는 그 십일조가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즉 십일조를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기를 바라신 것이죠. 그런데 바리새인은 십일조에 정성과 노력이라는 촛점을 두다보니, 하나님이 정하신 바도 없는, 고급 식재료의 십일조라면 더욱 더 하나님이 좋아하실거라고 생각한 것이죠. 완벽하게 하나님을 인간의 왕 취급하고 있죠. 이것을 인본주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하죠. 이 말씀 중에서 '이것도 행하고'라는 말씀 때문에 지금도 십일조를 반듯이 드려야 하는 것으로 교회는 가르칩니다. 일단 결론을 먼저 맺겠습니다. 십일조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이후 십일조는 필요없습니다.
일단 구약과 신약의 구분이 필요합니다. 구약은 말라기까지가 아닙니다. 구약은 정확히 예수님의 십자가까지입니다. 그 후 부활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순간부터 신약입니다. 구약의 목적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킬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그러자면 반듯이 율법(십일조, 할례, 제사 등)을 지켜야 하며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오르시기 전에는 반듯이 이 십일조(율법)를 하면서 우리는 십일조를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십일조는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대표가 예수님이시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한 분(1)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나머지 우리(9)를 천국으로 같이 데려가시죠. 이것이 십일조의 정체성입니다. 구약의 십일조가 아직 오시지 않은 예수님을 잊지 말라는 목적으로 계속 지킬 수 밖에 없는 것이였다면 신약의 십일조인 예수님이 오신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이 십일조 되심을 알고 하나님께 오직 예수님만을 드려야 하는 것' 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 받으십니다.)
이제부터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면 안됩니다. 이건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 십일조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가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고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으니' 그 분만을 드려야 합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죄와 우리의 발을 닦아주실 수 있다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교회는 구약의 율법 중에 십일조만 딱 골라서 행할까요? 왜 할례는 안하죠? 교회의 성장에 도움이 안되니 사라졌죠. 십일조는 그냥 교회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인본주의 산물입니다. 교회 십일조는 조기축구회에서 서로 밥먹기 위해 돈을 걷는 행위와 가치적으로 똑 같습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팔아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죠. 시장에서 콩나물 파는 할머니의 십일조를 강탈하여 목사는 중형세단을 타고 다니죠. 이건 조기축구회 보다도 나쁜짓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음 절에서 '하루살이와 낙타의 예'로 표현을 하셨죠. 이 말씀의 의미는 '하루살이에 의미를 너무 크게 갖게 되면 낙타라는 더 큰 나쁜짓'에 빠진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드리면 '하루살이'라는 상징적 표현으로써의 부정한 것에 집중한 나머지 진짜 실체적 참죄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에서 십일조에 집중한 나머지 그것의 실체인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상태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내가 먹지 못하고 내가 입을 것 못 먹고 그 돈을 아껴서 십일조와 헌금을 내면 안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에 '내가 이정도는 한다'라는 '자기 의'가 생겨버립니다. '자기 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믿는자로써 최소의 행위는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죠. 이 생각을 '누룩'이라고 하죠. 이 누룩이 내 전체를 상하게 하죠. 그냥 입을 것 사입고, 먹을 것 사드시고 이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방향입니다. (물론 이 방향도 좀 더 복음적으로 들어가면 설명드릴 것이 많습니다. 복음은 이처럼 정말 깊죠.)
지금의 한국교회가 십일조와 주일성수에 다 넘어갔죠.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는 구약의 말라기에서 처럼 "그냥 성전문 닫자"라고 하시죠. 지금의 코로나처럼. . .
"말라기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묵상합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십일조도 행하고 그것의 본질도 버리면 안되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 눈이 죄 짓게 하거든 내 눈을 빼어 버리고 그것의 본질도 이해하라'는 말과도 같고, 이 말은 '내 오른 손이 죄를 지으면 내 오른손을 찍어 내어버리고 그것의 본질도 이해하라'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해 하셨나요? 내 눈을 빼어 버리고, 내 오른 손을 찍어 내어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진짜 그래야만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것이지요. 우리는 이것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구원을 거저 받는 것입니다. 복음이지요.
이제 이해가 되시죠? 십일조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사실 구약에서도 십일조를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절대 십일조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것을 반복해서 한 번 해 봐라~~ 단 한번이라도 진정한 십일조를 너희가 할 수 있는지 너희 스스로 확인 해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몇 천년 동안 지시하신 것이죠.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에피소드를 기억하시죠? 하나님께 재산을 다 드린다고 말하고 재산의 얼마를 숨기다가 둘 다 죽은 부부의 에피소드입니다. 그 에피소드가 정확하게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를 가리킵니다. 즉, 10개 중 1개를 하나님께 드리고 '난 다 드렸다.' '난 시키는 대로 다 했다'고 한 그들이나 우리나 모두 '죽을 자'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린 우리의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까? 10개 중 1개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10개 중에 1개를 대표로 하나님께 드림 바 되어 내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표현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나머지 9개는 오직 나를 위해 쓰죠. 정확하게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이렇게 되지 말자'가 아닙니다. 인간은 십일조를 드리는 순간 100% 모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론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이것의 본질을 알게 된 자들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즉, 십일조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할 수 있고 그 분 자체가 십일조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래서 오직 우리는 예배에 들어가실 때 '돈'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들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냥 헌금과 십일조는 초대 교회 처럼 '연보'의 개념으로만 생각하세요.(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가 없었습니다. 이 후 몇백년 후에 다시 부활한 것이죠.) 연보의 '연'은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즉, 연보란 버리는 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조금 넉넉한 환경을 주실 때 욕심을 버리는 정도로 헌금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라 교회가 조금 어려울 때에는 그 기준이 바뀔 수는 있겠죠. 그러나 그 기준에 '가치'가 들어가고 대상에 '하나님'이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오직 여러분은 하나님께 예수님만 드려야 합니다. 그 분은 오직 예수님만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옷을 입고 있어야만 잔치에 참여할 수 있고 쫓겨나지 않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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