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오늘도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죠. 그런데 이 자들은 바로 '나'입니다. '이 자들과 같이 되지 말자'가 아니라 인본주의에서 종교활동을 하는 모든 자는 전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 무조건 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 역사상 왜 하필 2000년 전 그 날에 오셨을까요? 그것은 매우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 시대에 오셔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을 꾸짖었으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에 의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죠. 예수님께서 이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시대에 오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대에서 종교활동을 하는 '나'는 항상 외식하는 자입니다. 나는 속이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노력하는 순간 그 노력이라는 조건발동이 우리를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노력을 '탐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노력을 하지말자'라고 할 수 있죠. 그것을 '방탕'이라고 합니다. 방탕이란 말은 헬라어 원어로 보면 '낭비'라는 말입니다. 인생은 복음을 알려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그 노력에서 벗어난 것을 방탕, 즉 낭비라고 하는 것이죠.
노력을 하면 '탐욕'이 되고 노력을 안하면 '방탕'이 되는 것이죠. 이 두 가지만을 가진 인간은 냄새나는 죽은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인본주의적 자기의 기준으로 치장할 수 밖에 없죠. 이것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죠. 그런데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라고 하죠' 그런데 우리는 노력을 하면 탐욕이 되고 노력을 안하면 방탕이 되는데 어떻게 우리의 안을 깨끗이 할 수 가 있을 까요?
여기 부터가 복음이 맡은 몫 입니다. 우리는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죠. 이 노력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미 100%노력을 하셔서 100% 다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직 그 분의 신부에게만 성령을 통하여 이것을 알려주시죠. 이 '성령의 알림'을 알아 듣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죠. 그래서 믿음의 정의와 방향성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가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믿게 된다'가 정답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를 믿자'라는 말을 하지 마시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성령님을 통해 믿게 됩니다.' 라고 말하세요.
예수님께서는 외식에 대하여 매우 반복해서 이야기하시죠.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외식하는 자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바리새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죽인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바리새인이라고 절대 생각 안합니다. 교회생활을 10년 이상 하면 그들은 이미 뿌리까지 바리새인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들이 교회에서 잘하고 있었던 것들, 즉 주일성수, 봉사, 헌금등에 대하여 '너희들은 잘못하고 있다.' 라고 하면 100% 다 저항하죠. 특히 그렇게 말하는 상대방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일 수록, 혹은 본인의 노력이 대단할 수록 그 저항은 더 크죠. 그 저항은 오해와 박해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 분의 어머니에 대하여 '누가 내 어머니냐?'라고 하면서 면전에서 부인하셨죠. 이 정도는 복음에서 '약한 선언'에 불과 하죠. 그 분은 살아있는 자에게 '죽은 자'라고 하셨죠. 최고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는 욕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은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집에서 아내를 때리는 집사가 교회만 오면 사람 좋은 척하는' 수준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 말은 평생을 아프리카에서 봉사를 하는 사람, 자식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아 키운 사람,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신장을 나누어 주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생각하는 인본주의 꼭대기(top of top)에서 존경받은 사람을 말하죠. 그 꼭대기에 가장 많이 몰려 있었던 사람들의 시대가 바로 '바리새인의 시대'였던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칭하셨고 '외식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얼마전에 정인이라는 아이가 부모에게 아동학대를 받아 죽은 사건이 사회를 시끄럽게 했죠. 그 부모는 정인이의 친부모가 아니라 양부모였습니다. 그들이 정인이를 입양할 때의 시절로 돌아가서 그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그들은 완벽하게 '휼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론적으로 보면 그들은 정인이를 때려서 죽인 파렴치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죠. 이 사건이 정확하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방향성에 있습니다. 문제는 '바리새인'은 이 '입양과 양육'으로 상징되는 '휼륭한 과정'을 죽을 때까지 휼륭하게 해낸다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을 정인이의 부모와 동일한 '불법자'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선택받은 자들의 눈을 뜨게 해주시면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선'의 개념입니다. 그 전에는 '이런 것이 선이다. 저런 것이 악이다.'라고 우리가 기준이 되어 선택을 하죠. 그러나 복음을 알게 되면 오직 예수님만이 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사실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쉽게 설명 드릴께요. '예수님만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이 틀린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본질에 대한 이해가 쉽습니다. 즉, '예수님만이 선을 행할 수 있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는 모든 것이 선이다.'라는 말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라' 하면 그것은 '살인'이라는 '악'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선'입니다. 이 두 가지의 차이가 정확하게 '요단강'의 이쪽과 저쪽의 차이죠. 인간의 힘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론으로 오늘 숙제를 내드리죠.
정인이 양부모의 아동학대 행위는 과연 선일까요? 악일까요? 이 대답을 하루 종일 묵상해보세요. ( 악이라구요? 너무 빠르게 단정짖지 마세요. 정인이 양부모의 행위를 이 세상에 드러내어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하여 복음을 이해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라면요? --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린아이, 어린 가축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면요? 이제 헤깔리시죠? 왜 헤깔릴까요? 그것도 묵상해보세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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