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오늘도 여지없이 '외식하는 나'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선지자들과 의롭다고 쓰여진 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죠.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예전에 태어났다면 그런 선지자들을 박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본주의 종교 의'를 가리킵니다. 이런 인본주의 종교 의를 가지고 있는 한 '진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인본주의에서 죄를 저지르면 죄책감이라는 틈이 생깁니다. 스스로 죄인인 것을 알게 되죠. 그래서 자기의 가치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상태가 되죠. 그래서 애통한 상태가 되는데 이 상태가 '복'있는 자, 즉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자가 됩니다. ( 그렇다고 죄를 저지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에서 죄를 발견하라는 방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
죄의 참 정의는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자기 의(자기기준)'을 갖고 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손가락인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것을 폭로했는데 자기 의를 가진 자들은 그들을 죽이죠. 그런데 그것을 듣고 자란 자손들인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에 자신들이 있었다면 그들을 박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다시 '자기 의'를 내세우죠.
예수님이 이렇게 조상들의 행실을 말한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그 말씀을 통해서 '나도 그 당시 그 곳에 있었더라면 그들을 죽였겠구나~~ 내가 바로 선지자를 박해하는 당사자로구나~~'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었죠. 그러나 바리새인은 반대의 결과로 나타나죠.
그런데 여기서 한번 더 중요한 반전은 이 '바리새인의 결과'는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읽는 자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선지자를 박해한 조상의 이야기를 자기의 이야기로 받지 못하고 그들을 비판하고 '난 그러지 않을 텐데'라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을 성경에서 읽고 있는 '내'가 '난 바리새인같이 않다~~'라고 한다면 바로 내가 그들과 같은 심판에 묶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선택받은 자라면 이것을 알아듣고 '아~~ 내가 바로 바리새인이었구나.~~~ 내가 그 당시 있었다면 나도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이고 십자가에 매달았었겠구나~~'의 방향성을 갖게 되죠.
말씀 중에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라고 하시죠. 즉, '나라면 선지자들을 보호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말고 오히려 '나도 역시 우리 조상과 같이 선지자들을 죽였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판단하시는지 보세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하시죠. 이게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부 지옥에 갑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님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 분 예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은혜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죠. 그것을 바라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고 그 유일한 것 조차도 출처는 나로부터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부터 시작되어 성령님께서 알려주시면서 형성된 것입니다.
모든 의로운 피, 즉 복음을 설명하는 모든 피는 다 '나' 때문에 흘리게 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죠. 복음을 '암탉이 알을 모으는 것'처럼 표현하셨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아니한다고 하시죠. 복음을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는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선택받은 자들은 이미 정해져 있고 성령께서 그 자들에게만 복음을 알려주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부분은 안 믿는 자들을 향한 경고성 발언이라기 보다는 선택받은 자들의 더 넓은 복음의 이해를 위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심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안 믿는 자들을 고통받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정확하게 인본주의 종교입니다. 즉, 하나님을 인간화 시켜서 '그러할 것이다.' 라는 방향성이죠. )
몇일 동안 계속 바리새인의 외식에 대한 묵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폭로하신 것이고 '뱀과 독사의 새끼들아'고 욕을 하셨죠. 그런데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이 매우 이상하게 끝나죠. '찬송하라'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조건이 붙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로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한다'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말만 하면 주님을 볼 수있다'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보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독사의 새끼'라고 자신을 알게 된 자들만 오직 '예수님(성령님)'으로 인하여 주님을 볼 수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저희 식구는 저녁에 이 묵상을 가지고 매일 15분 정도 짧게 묵상예배를 드립니다. 그 때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끔 말하는 '망원경 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짧게 소개하고 마치죠.
망원경은 랜즈라는 것을 끼고 목표물을 보는 도구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인본주의 종교로써의 기독교와 복음으로 쉽게 구분해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인본주의 종교는 망원경에 '예수님'이라는 랜즈를 끼고, 즉 예수님을 통해 천국을 가려는 것입니다. 조금 수준 낮은 경우는 예수님을 통해 '잘살기'를 바라는 것이죠. 더 수준을 떨어 뜨리면 예수님을 통해 '병낫기' '대학가기' '내 아들 잘되기'를 목표하는 것이죠.
그러나 복음은 어떤 랜즈를 끼더라도 목표물이 '예수님'입니다. 망원경은 기본적으로 랜즈가 2개죠. 그런데 천제 망원경과 같은 것은 3개 이상도 됩니다. 즉, 우리의 인생에 행복이라는 랜즈, 고난이라는 랜즈 등등 어떠한 랜즈를 성령께서 갈아 끼우고 더 추가 해서 넣어 준다고 해도 그 이유는 바로 목표물을 더 잘 보이게 하는 것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유일한 목표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랜즈가 예수님인가? 목표가 예수님인가?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오늘 하루 더 묵상해보세요.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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