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태복음 24장은 계속 종말에 관하여 말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부터가 모두 종말입니다. 이 24장은 세대주의자들이 좋아할만한 내용들이 많죠. 세대주의란 역사적인 사회현상을 성경과 매치시켜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세대주의자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주로 많이 사용하죠. 이 사람들의 해석방식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모든 역사, 사회, 문화도 결국 하나님이 창조한 것들이고 이렇게 창조된 모든 것은 결국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결정적 오류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결과가 복음에 있지 않고 세대주의 해석 그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을 역사를 해석하고 인생을 해석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그곳에 멈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24장을 로마에 의해 붕괴된 성전을 예언하거나 독일인의 유대인 학살을 예언하거나 현재에 와서는 바코드, 정치인, 교황, 타락한 교회목사을 예언한다고 말하기도 하죠. 이 모든 것들이 '멸망의 가능한 것'이 맞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질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참 본질을 알아보죠.
'멸망의 가증한 것'의 정확한 정체는 뭘까요? 인본주의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곳'은 어디일까요? 교회죠. 성경은 우리에게 성전이라고 하죠.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성전이라고 하죠. 그래서 교회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 곳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즉 인본주의가 들어와 있는 것을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24장은 '나'에 대한 종말이야기이고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촛점입니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라고 하죠. 산은 성전을 말합니다. 즉, 진짜 성전을 말합니다. 진짜 성전은 무엇이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성전이라고도 하죠. 헤깔리죠?
그러면 우리가 성전인가? 예수님이 성전인가? 헤깔리죠? 그 이유는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말은 성경의 '한 몸'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상징인 솔로몬과 교회의 상징인 슬람미여인이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를 담은 아가서를 읽다보면 관점이 매우 헤깔립니다. 이게 솔로몬이 슬람미 여인한테 사랑고백하는 말인지, 슬람미 여인이 솔로몬에게 사랑고백하는 말인지 매우 헤깔리죠. 그런데 그 헤깔림 조차도 말씀의 의도입니다. 즉, 이 둘은 결국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점이 왔다 갔다 하면서 '한 몸'원리를 시점으로 설명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도 최초 둘로 만든 것이 아니라 아담만 만들고 하와는 그 아담의 뼈로 만든 것이죠. 하나님은 남자와 여가가 하나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런 방식으로 만드셔서 설명하신 것이죠. 즉, 예수님과 교회(나)는 하나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가 같이 못 박혔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예수님이 나로 오셔서 2천년 전에 '모두 이루었다.'에 내가 동참되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설명은 길지만 핵심은 쉽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인본주의가 오히려 신앙의 주체가 되어 인본주의종교가 되어버리니 거기에서 나와서 예수님께로 피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 구절에서 말하고 계시죠.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며' 이말은 소돔과 고모라를 벗어나는 롯의 식구들에게 뒤도 돌아보지 말고 산으로 도망쳐라는 구약의 상황과 똑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쉽죠?
'너희는 인본주의와 분리된 자들이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녹녹치가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인본주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표현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신 것이죠. 우리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까요?
지붕이란 집안의 물건을 비, 바람등으로 부터 지키는 것이죠. 그 지붕을 만들고 고친 사람이 그 지붕 위에 있다고 해보죠. 그런데 그 지붕이 지키려는 목적인 집 안의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고 하시죠. 모순입니다. 우리가 인본주의와 분리되서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간 것은 맞지만 우리의 옛자아는 계속 인본주의 속에 살게 되는 모순된 상황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좀 더 결론적으로 설명을 드리면, 우리가 인본주의에서 노력하며 살아야 하지만 그것의 목적이 인본주의 열매를 따먹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인본주의의 무가치함을 알게되어 도망쳐 복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죠.
밭일을 하기 위해서는 잠시 겉옷을 벗고 하죠. 그리고 밭의 일이 끝나면 다시 옷을 입으러 가죠. 이것도 같은 상황이지만 조금은 다른 각도의 이야기입니다. 지붕의 에피소드가 인본주의의 노력과 결실에 대한 부분이었다면 이 말은 인본주의에서의 당연한 삶의 연속을 뜻합니다. 이 당연한 삶의 연속성도 인본주의와 복음의 분리를 위해서 언제든지 포기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위와 같은 상황이 구약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구름기둥(성령의 상징=하나님의 긍휼)이 움직이는 곳을 따라 이리 저리로 옮겨다니는 상황있었죠. 그들은 광야의 어느 지점에 도착하면 집짓고 지붕을 만들고 밭에서 겉 옷을 벗고 땅을 갈았겠죠. 그런데 그 때 구름기둥이 옮겨지면 다 버리고 다시 빨리 이동하는 상황이 나왔겠죠.
이들이 이렇게 했던 이유는 그 구름기둥을 벗어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죠? 그들은 애굽에서 나오기 전 문설주에 묻은 어린양의 피에 보호받지 못한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음을 당한 것을 뿌리깊게 인식하고 있었죠. 그리고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 구름기둥이 그 때의 어린양의 피(예수님의 상징 =하나님의 긍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 어린양의 피가 지금은 예수란다"라고 하시죠.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인본주의에서 도망하여 예수님으로 피신해야 산다' 는 복음이 삶이 되어야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