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4:19-22(22.02.18.금)

은혜바라기 2022. 2. 18. 09:12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여기서 '그 날'은 종말입니다. 종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부터이므로 지금 우리는 종말에 살고 있는 것이죠. 

 일단 촛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촛점을 잃어 버리면 결국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24장 종말의 촛점은 무엇이었죠? '인본주의에서 분리하여 복음의 진영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경 전체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나오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라'는 말씀도 다 같은 말씀이죠. 이 촛점을 잘 기억하면서 해석을 해보죠. 

 '아이를 배는 것과 젖을 먹이는 것'은 어떤 나라에서든지 가장 고결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인본주의 최상위 가치를 차지하죠. 그런데 복음은 인본주의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즉, 인본주의 최상위 가치를 실행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복음의 방향으로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촛점을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복음 조차도 행위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이런 해석을 들으면 '그럼! 자식을 버리라는 것이냐?'라고 결국 행위적 결과론으로 좌, 우로 나누죠. 또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국 복음은 내가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태초에 이미 선택된 자들에게 성령께서 가르치는 것이므로 완벽한 복음의 본질적 이해는 성령의 '주어짐'에 의해 이루어지죠.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자식을 배고, 젖먹이고, 키우는 엄마가 그 자체의 행위가 사실 '무가치' 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행위가 너무 휼륭한 행위라는 것을 온 인류가 가르치고 칭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행위가 가치가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통해 복음을 알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행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고 먹이시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히려 '죄를 지은 사람'이 이것을 더 쉽게 알아듣게 됩니다. 이렇게 고결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그 행위에 묶여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오늘의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조금 어렵죠? 그런데 이것이 보이면 복음이 잘 보이시는 것입니다. )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게'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분명하게 나오죠. '도망가라고!'  이 도망이 바로 인본주의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겨울과 안식일은 무엇일까? 겨울은 춥기 때문에 밖에서 움직이는 것이 매우 힘들죠. 그리고 안식일은 일정한 범위 이상을 움직이면 안되도록 율법이 정한 날이죠. 결국 둘 다 도망가기 힘든 상태를 말하죠. 결론은 '인본주의적 자연관'과 '인본주의적 종교관' 때문에 우리는 복음의 진영으로 도망가기가 힘들다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환난은 안 믿는 자들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성경은 오직 그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을 믿지 않는 자들을 겁주려고, 협박하려고, 복수하려고 종말의 환난을 주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인본주의 종교관'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처럼 생각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과 환난' 은 오직 그 분이 선택한 자들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종말에 대한 말씀의 목적은 그것을 미리 알려 선택받은 자들이 두려움을 이겨 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환난은 어떠한 육체도 감당을 못해서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해서 그 날을 감한다고 하시죠. 매우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겪을 환난의 강도(삶의 어려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감당 못할 정도의 환난이란 선택받은 자들이 이 인본주의 세상에 묶여서 허우적대는 상황 그 자체를 이야기합니다. 한번 더 예를 들어보죠. 
 
 택시기사가 매우 큰 경제적 고난에 빠져서 길거리에서 자기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자살을 했다는 가정을 해보죠. 이것이 뉴스에 실리면서 정부는 택시기사들의 처우를 높여주고 그 혜택을 받은 많은 택시 기사들은 그 분신자살한 택시기사의 이름에 '성자'의 칭호를 넣고 그를 기리죠. 그래서 그는 인본주의 꼭대기의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환난이란 이 에피소드의 첫 머리에 나오는 '택시기사의 경제적 고난'이 아닙니다. 진짜 환난은 이 에피소드에 흐르는 인본주의 시스템 전체를 말합니다. 인본주의는 이렇게 '인본주의적 의로움' 라는 완벽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이 인본주의 굴레에서 절대 빠져 나올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스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절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날을 감한다라고 하시죠. 여기서 중요한 말이 나오죠. 정확히 '택하신 자'라는 표현을 하셨죠. 보편적 구원은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선택적 구원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자들을 위해 그 날을 감한다고 하는 것은 '택시기사의 경제적 고난'을 조금 약하게 해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 택시기사의 에피소드에서 나온 인본주의 굴레(선악구조)에서 절대 빠져나올 수가 없으니 주님의 힘이 간섭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간섭을 받은 자들은 그제서야 본질(복음)을 잠깐 잠깐식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을 참믿음이라고 하죠. 그 때 우리는 잠깐 '아! 인생의 목적이 이것이었구나!' 라고 외칠 수가 있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과 제자들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을 올라가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시고 예수님은 기도를 하십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제자들은 다 자고 있었죠. 다시 깨우고 기도하기를 3번을 반복 하십니다. 마지막은 제자들에게 '이제 그냥 자고 쉬라'고 하면서 이 에피소드가 끝을 맺죠. 

 

 복음을 조금 알아듣는 자들이 매우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이제 '뭘 좀 안다.'는 것에 묶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서  '인본주의 복음'에 묶여 버리는 것입니다. 즉, '인본주의 종교'에서 '인본주의 복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인간은 절대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의 눈을 뜬다는 것은 이것을 간파하고 '내가 항상 자는 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이 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다는 자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른다는 자들은 아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성경에 나온 것이죠. (인간은 또 이 말도 '그래 나 몰라' 라는 고급 기술로 포장해서 사용합니다.-이 부분이 글로는 잘 설명이 안되네요. 그 뉘앙스가 무엇을 말하는지 여러분은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올바른 묵상과 설교는 그것이 끝난 후에 '복음과 예수님'을 계속 생각하며 묵상하게 되고 인본주의 종교는 그 설교가 끝난 후에 '그래 이제 부터 OO을 더욱 잘하자.'로 각오하게 되죠. 이 두 방향성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한쪽은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이고 한 방향은 자신(인본주의/이 땅의 가치)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이죠. 이 자들은 결국 죽을 때 까지 이 땅(지)에 묶입(옥)니다.

 

  (바로 위에서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가는 자들'이라는 말도 사실 인본주의 종교에 묶인 말입니다. ---- 결국 우리는 이 말 조차도 할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복음을 더 깊이 더 넓게 알수록 '내가 없어집니다.' 그냥 '예수님만 남아요.' )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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