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라는 말씀은 이단들이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강단에서 선포하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인본주의 기독교 전체를 뜻합니다. 매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니까 잘 들어주세요.
이 말씀의 진정한 요지는 '그리스도를 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쫓을 수 있는 목표가 아닙니다. 진정한 복음은 반대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찾아낸 것을 믿는 것이죠. 무슨 말인가 헤깔리시죠? 어렵죠!. 그래도 묵상을 깊이 하셔야 합니다. 복음은 내가 부인되고 오직 예수님의 지체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를 쫓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분리된 상태를 베이스로 깔아 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그리스도의 옆까지 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자답게 살자' '그리스도의 향기를 피우자' 등등의 모든 말이 다 여기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발을 닦아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처럼 내가 예수님의 발을 닦아 주겠다고 하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처럼 '너는 나와 상관없다.'라고 하십니다. 지금 종말의 때에 교회의 예배, 봉사, 헌금 의 형태를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러 가는 형태죠. 그리고 목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라고 하죠. 그래서 더 휼륭한 신자 되야 한다고 설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만든 종교인 인본주의 종교입니다. 인본주의 기독교 뿐 아니라 인류의 모든 종교 활동의 공통점이죠.
지금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자체가 일종의 상징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실 예배는 드려도 되고 안드려도 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예배는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미 단번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이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삶의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이러한 상징적 예배는 그것 자체를 거룩하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예배의 모습은 오히려 예배의 시간에 이 예배가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진짜입니다.(그러나 예배 시간에 말씀을 통해 그것을 묵상하게 되므로 예배가 필요하죠. 이것이야 말로 지독한 이중 역설인 셈입니다. - 지독한 패러독스죠. )
좀 더 확장해서 말하면, 예배를 드리면서 나의 모든 봉사, 노력, 헌신, 헌금등이 무가치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기억하면서 오직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을 묵상하는 것이죠. 그 때 이런 방법으로(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방법) 복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참 예배란, 진짜 예배이자 단 한번의 유일한 예배였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죠. (오늘의 말씀은 이 방향성을 잘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절이 거짓 선지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고 택하신 자들도 미혹한다고 나온 것입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큰 표적과 기사를 보고, 따르고, 노력하고, 다가가려고 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미혹이라고 표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 종교의 핵심이에요. 어떤 설교가 되었던, 우리의 행위가 목적이 되는 설교하면 무조건 이단입니다. (우리의 행위적 신앙을 좀 더 쉽게 표적과 기사로 표현하신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절에서 이것을 더욱 강조하여 설명하시죠.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말라' 즉, 그리스도는 너희가 따르고, 보고, 노력해서 다가갈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번개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번쩍임같이 임하신 다고 하죠. 이 말씀을 가지고 세상이 끝나는 날 예수님이 하늘에서 이런 방법으로 내려올 것이라고 설교를 하죠.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이 말씀의 정확한 요지는 앞에서 나온 말씀의 연속이며 부연 설명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가 보고 쫓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말입니다.
정리하면,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은 교회라는 장소를 노력해서 다니면서 자신의 지극정성으로 신앙생활을 해서 천국을 완성해 나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방법이 전부 다 틀렸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는 이미 태초에 정해져 있고 성령께서 그들의 인생에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무가치한가~'를 알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님만을 소망하게 만들죠. 그런데 그 시기와 때는 그 스스로도 잘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어쩐 시기에 '난 복음이 이제 조금 보여~' '이제 성경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가 정확하게 성령께서 오셔서 일하시기 시작한 시기가 아닙니다. 어쩌면 이 시기는 우리가 7살때 동네 가게에서 껌 한통을 훔친 날부터 시작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자식이 사고로 죽은 날 부터 시작된 것이 수도 있죠. 즉, 성령께서 우리를 어떤 시간에, 어떤 방법으로 견인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매우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계속해서 반복해서 설명하시죠. 이것만 마음속에 간직하세요 "예수님은 내가 보고(생각해서) 쫓아갈 수(노력하는 행위로)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직 그 분의 긍휼만을 기다려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