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4:6-14(22.02.16.수)

은혜바라기 2022. 2. 16. 08:52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난리'란 다음절에서 말하는 '전쟁, 기근, 지진'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고 하시죠. 무슨 말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이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면 그 직전에 이런 증상이 심해질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을 하죠. 그러나 그것을 잘못 해석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하셨죠.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전쟁, 기근, 지진'은 항상 지구상에서 발생했죠.

 이 말씀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믿는 '근본들'을 흔드셔서 너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금'이 종말이라는 것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부터가 전부 종말에 해당 됩니다. 의미적으로 보면 세상이 창조된 이후가 전부 종말입니다. 

 

 결국 우리의 올바른 인생관은 '종말론적 인생관'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구약으로 돌아가 보죠. 구약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대표적인 인물이 에녹입니다. 이것을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매우 부러워 하죠. 이 사람의 자식이 무두셀라입니다. 인간으로써 가장 오래 산 인물이죠. 969살을 살았죠. 그런데 이 '무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이 '이 사람이 죽으면 종말이 온다'라는 뜻입니다. 에녹은 이 자식이 죽으면 세상이 끝장나니까 늘 자식이 넘어지던, 아프던, 눈에서 안보이던 "이 아이가 죽으면 종말인데!, 종말인데! 어쩌지! " 하며 살았을 것이죠. 즉, 전 인생을 이렇게 종말론적 인생론으로 산 자가 에녹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게 종말론적 삶을 산 자는 죽음이라는 것이 필요없다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최후의 고난을 주신 이유는 인간이 죽음을 묵상하게 만들어서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한 고민은 결국 예수님의 필요성까지 생각하게 만들죠. 그런데 인간은 이것을 항상 잊어 버립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늘 '인본주의'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병'을 주십니다. 병이란 간접적인 죽음이죠. 병을 통해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죽음'을 통해 다시 천국과 예수님을 고민하게 만드는 시스템인 것이죠. 그런데 에녹은 자신의 아들 때문에 이 과정이 필요없는 자였던 것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통해 고민하지 않아도 늘 자식을 통해 그것을 고민하고 묵상할 수 있는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자'가 된 것이죠. 즉, 그가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선택된 자들에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참고로 무두셀라가 죽던 날이 정확히 노아의 홍수가 일어난 날입니다. 정확하게 인류의 심판이 일어난 날이죠. 소름끼치죠? 그래서 무두셀라가 인간 중 제일 오래 산 이유가 하나님이 심판을 오래참으신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더 소름끼치죠? 무수셀라가 인간 중에 가장 오랜 산 이유가 식생활을 잘 해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오래참음이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인간의 나이가 대부분 918 923 942... 이런 식이죠. 그 이유도 있습니다. '1,000'이라는 숫자가 바로 완전수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이 땅에서 완전한 삶을 살 수 없다는 하나님의 반복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묶었죠. 이 12는 교회의 숫자입니다. 즉, 인간은 이 땅에서 12(교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지체들을 뜻합니다. - 지금의 지역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

 이제 정리가 되시죠?  하나님은 세상 곳곳에 인본주의에서 최고라고 믿는 것들, 즉 '인간의 결합, 땅, 먹고사는 문제'를 '전쟁, 지진, 기근'을 통해 계속 흔드시므로 종말을 계속 생각하게 만드신 것이고 그것을 통해 복음을 생각하는 기회로 삼으시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죠. 우리 인생 자체가 종말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흔드시고 계시죠. 

 그렇다면 복음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종말론적 인생에서 어떠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그 다음절 부터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 죽음, 미움, 실족에 처하게 한다'고 하죠.

 

 복음은 인본주의와 완벽하게 등져 있습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면서 복음의 진영속에 살아간다는 말은 절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본주의 행복감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직 예수님에게 피신하게 하여 영적 평강을 느끼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시죠.

 인본주의에서도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어! , 인생을 잘 살면서도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어! , 예수님을 믿으면 인격자가 되!  라고 설교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다음절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한다'고 하죠. 그리고 그것은 불법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불법의 상태에서는 사랑이 없어진다고 하죠.

 

 성경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말은 전부 복음으로 바꾸면 됩니다. 하나님이 말하는 사랑의 정의는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사람이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는 진리가 아닙니다. 사랑의 참 뜻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죠.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은 이런 것이야"하고 사랑의 정의를 역사와 성경에서 매우 강력하게 설명하시는데 그것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죠. 단연히 주인공은 예수님이시고요.

 중간 결론도 결국 이렇게 맺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죠. 이것은 우리가 견딘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견디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중요하니까 예를 들어보죠. '끝까지 견뎌라!' 라는 말을 들을 때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내가 힘써,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견뎌보기 위해 노력하자' 라고 외치죠. 그러나 천국에 도달하기 위한 견딤은 내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결국 이 자들은 무너지거나 외식을 하죠. 둘 다 꽝입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는 '예수님께서 나로 오셔서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까지 견디시고 부활을 하셨다' 는 것을 알게 되죠. 즉, 우리의 견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본질을 알게 된 것을 끝까지 유지하는 견딤을 말합니다.

 

(( 주관적이 예를 들자면, 복음에 대한 묵상은 사실 매우 재미없습니다. 읽다 보면 항상 같은 주제로 결론이 나기 때문이죠. 결론이 항상 예수님 뿐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성(길)만 계속 제시하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묵상을 자주 하지 못하고 다시 누룩섞인 인본주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 곳은 재미나죠. 신앙을 쌓을 수 있고 그 성과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냥 놔두게 되면 그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부들은 곧 '고난'을 겪게 되죠. 혹은 '모순'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진리로 돌아오게 되죠. 즉, 다시 재미없는 복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
 
 그래서 오늘 말씀의 마지막 결론도 '천국 복음이 세상에 다 전파되면 끝이 온다'고 하죠. 이 말은 아마존과 남,북극까지 복음이 전해지면 세상의 끝이 온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복음을 이해하는 자들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으면 세상의 끝이 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우주, 역사, 성경'을 통해 복음을 이해하도록 만드셨는데 단 한 사람도 그것을 이해하는 자가 없을 경우 그 자체가 이 세상의 완벽한 종말임을 뜻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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