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4:42-51(22.02.24.목)

은혜바라기 2022. 2. 24. 08:58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오늘의 주제는 '깨어 있으라'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매우 매우 중요한 말이죠. 이 말이 24장 종말론의 결론입니다. 그러면 과연 '깨어 있으라'는 말이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이 말을 '신앙 생활 열심히 하라'는 말로 알아 듣죠. 그런데 오히려 그것은 '자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 듣기 위해서 열처녀의 비유를 잠깐 살펴보죠. 매우 매우 중요하니 잘 묵상하세요

 열처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다섯 처녀만을 데리고 가시면서 '깨어 있으라'고 이야기하시죠. 그러면 이 에피소드의 내용이 대충 '10명 중 5명은 자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말씀을 잘 살펴보면 열 처녀는 처음부터 전부 자고 있었습니다. 이상하죠? 그러면 과연 두 그룹은 무슨 차이가 있었는가? 두 그룹은 등잔에 기름이 있고 없는 차이만 있었죠. 이 기름은 당연히 '성령'입니다. 성령님이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좀 더 이 에피소드를 묵상해보죠. 이 기름(성령)을 가진 자나, 안 가진 자나 전부 '잔다'라고 표현이 됩니다. 즉, 전부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이 자들이 살아나는 것은 생명이신 신랑 예수님을 만나야 살게 되는 것이죠. 이 5명과 저 5명의 차이는 '기름'의 존재 여부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힌트가 나옵니다. 선택받지 못한 5명의 기름없는 처녀들의 모습입니다. 이 처녀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기름을 사러 나가는 행위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행위'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의 행위에 묶여 있는 동안 예수님이 오셔서 다른 다섯 처녀를 구원해 가시죠.

 이 에피소드가 내일 우리가 묵상할 에피소드입니다. 너무 재미있지 않나요? 24장 종말장의 결론을 '깨어있으라'로 끝내시고 바로 연결해서 25장에서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깨어 있다는 것'과 '잠을 잔다는 것'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는 것이죠. (성경은 원래 장과 절이 없습니다. 후대에 사람들이 성경을 편하게 보기 위해 장과 절을 나누어 놓았죠. 그런데 그 '편리함'이 이렇게 문맥의 연결성에서 알게 되는 은혜를 놓치게 하죠. 이게 바로 항상 인간들의 짓입니다.)

 

 내일 이 에피소드에 대하여 묵상을 해야하니 오늘은 여기서 오늘의 묵상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집주인이 도둑이 언제 올 줄 알면.. 깨어 있어... 집을 지킬텐데...' 여기서 도둑은 예수님입니다. 웃기죠? 왜 예수님을 도둑으로 비유를 하셨을까? 하나님의 방향성에서 보면 '도둑'이나 '독립군 애국자'나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 무엇을 가져다가 쓰던 복음으로 설명이 된다면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는 것이죠.  여기서 도둑을 가져다 쓰신 것은 도둑의 '나쁜 놈의 습성'에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몰래 들어 닥치는 습성'에 촛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되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도둑을 어떻게 예수님으로 비유할 수가 있어? 아닐꺼야~'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기준에 도둑은 나쁜 것이라는, 선악구조(죄)에 묶여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 정확하게 설명해 주시죠. '이런 비유처럼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야(깨어 있어야) 인자(예수님)가 올 때를 알 수 있다.(복음을 알아 들을 수가 있다.)' 로 풀어 주십니다.  

 

 그 다음절에 나온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은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인본주의종교인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전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자!~'로 바꾸어 버리죠. 그러나 이 말씀은 오직 예수님만 이 집사람들(선택된 자들)에게 양식(복음)을 나누어 주실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이 종(예수님)에게 다 맡긴다(심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에 나온 종은 바로 '나'입니다. 이 종(나)은 '주인이 더디올꺼야! 그러니 동료를 때리고 친구들과 술마시자!' 라고 판단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료를 때리고' 와 '친구들과 술마시는 것'은 바로 '비판'과 '방탕'을 말합니다. 이 뜻을 간략하게 설명드릴께요. 

 

 '비판'의 본질은 바로 '분리'에 있습니다. 비판은 '너는 나와 같지 않다'라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 깔고 하는 행위입니다. 즉, 너는 틀리고 나는 맞다는 것이 본질이죠. 그래서 그 비판하는 여러 방식 중에 행위의 한가지인 '때리기(말로 때리기, 주먹으로 때리기 등등)'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동료'를 때린다고 하셨죠. 동료는 예수님의 지체를 말합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비판은 예수님과 스스로 분리하는 것입니다. 이것과 반대로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이죠. 즉, TV에서 자식을 때려 죽인 부모를 보면서 '내가 저 사람과 같구나~~'라는 묵상까지 연결되는 자들이 바로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순간입니다. 

 '방탕'은 히브리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낭비'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을 통해 복음을 알기 바라시죠. 그런데 그 복음을 찾지 못하고 오직 '잘살기'에 묶여 사는 것을 하나님의 방향에서 보면 '낭비'하는 시간입니다. 이것을 '방탕'이라고 합니다. 이런 '방탕'의 속성을 인간에게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형태가 바로 '술마시기'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벌을 받고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이들에게 그들의 예배, 봉사, 헌금의 헌신적 신앙생활을 '방탕한 삶'이라고 하니 당연히 이들은 이를 갈게 되죠. 예수님이 당시 최고의 인격적 종교인 바리새인에게 '마귀의 자식들아!'라고 하니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었던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복음의 안경을 쓰지 못하면 이 메카니즘을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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