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5:1-13(22.02.25.금)

은혜바라기 2022. 2. 25. 09:28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어제의 묵상에서 잠깐 언급한 열 처녀비유가 오늘의 묵상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께서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깨어 있으라'고 결론 짓죠. 그리고 바로 25장에 나온 이 열 처녀 비유의 핵심이 '깨어 있으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구성에서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이 비유에 들어가기 앞서, 엉뚱한 질문을 한개 드립니다. 남, 북극의 빙하가 더 많이 녹으면서 그 안에서 노아의 방주가 원형 그대로 보관된 채로 이 세상에 등장한다는 가정을 해보죠. 과학자들이 그 안에서 얼어 있던 DNA를 연구해 보니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짐승의 DNA가 전부 다 있었던 것으로 발표가 되고 그 방주의 규모와 크기가 성경에서 말한 것과 완벽하게 똑 같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가정을 해 보죠. 

 

 여러분은 위에서 말한 이 '가정'이 복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아직 복음에 대하여 눈을 뜬 것이 아닙니다. 이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하신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해도 '복음'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와 '복음'의 경계입니다. 그리고 '사실'과 '진리'의 경계입니다.

 

 오히려 이 '가정'은 복음을 훼방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성경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되면 인간은 그것을 '종교화' '믿음화' 시키고 그것에 자신을 묶어 버립니다. 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그 핵심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아담의 시기 때에도 하나님의 존재는 사실이라고 확실히 믿었고, 구약의 각종 기적을 눈으로 확인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말씀을 진짜 '사실'로 믿었습니다. 그 '사실'을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삼았죠. 그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참 진리인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너무나 아이러니하죠? 하나님이 존재하고 성경이 완벽한 사실이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진리와 더 멀어지면서 진리를 박해하고 그 진리의 실체를 죽여버리는 장면이 진짜 성경이 말하는 '참 진리'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진심으로 이 핵심의 강을 건넜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앞서 이 묵상안의 묵상을 하게 된 이유는 바로 '깨어 있으라'의 힌트를 조금이라도 더 드리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럼 본문 묵상을 해 보죠. 

 

 본문의 신랑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유대인의 결혼식은 밤에 합니다. 재미있죠? 그런데 성경에서 밤은 이 세상, 즉 인본주의를 뜻하죠. 그래서 밤에 신랑이 온다는 것은 바로 이 세상 인본주의(죄)로 예수님이 와서 구원을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유대인의 결혼식을 하나님께서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의 시작을 2절에서 보면 이미 다섯 처녀는 미련하고 나머지 다섯 처녀는 슬기 있는 자라고 지정하고 시작하죠. 즉, 이미 구원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랑'의 속성 중에 가장 중요한 속성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만 선택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가장 큰 속성이죠. 이것을 하나님께서넌 우리의 인생에서 매우 많이 경험하게 하십니다. (남과 여, 부모와 자식...)

 

 이 두 그룹의 차이를 바로 3, 4절에서 등잔의 기름이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로 구분합니다. 이 기름은 바로 '성령'입니다. 보통 교회에서, 나는 45살에 구원받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많이 하죠.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 분의 태어나심 아니 더 정확하게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표현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 전부터 그 분과 함께 한 성령님의 인도함을 표현한 에피소드죠. 

 

 그리고 중요한 말씀이 5절에 나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라고 표현되어 있죠. 여기서 '다'라고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의 끝인 13절에 보면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참 이상합니다. 즉, 열 처녀 모두 잠자는 인생, 즉 죽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고 있었던 5처녀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상합니다. (성경은 항상 이런식입니다. 성경은 자세히 읽을수록 어색함이 드러나고, 더 자세히 읽으면 모순이 드러나죠. 그래서 그냥 합리화 시켜버리죠. 이 알 수 없는 '괴리감(모순)'이 여러분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성령의 작은 속삭임입니다. 이것에 귀닫지 마세요. )

 

 그런데 여기서 이 '깨어 있으라'는 말을 한 이유가 그전 11,12절에 나옵니다. 즉, 선택을 받지 못한 5 처녀가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즉 깨어 있어라'입니다. 즉, 이 선택받지 못한 5 처녀의 '어떤 것'이 깨어 있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뭘까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등장의 '기름'이 없는 것입니다. 즉, 기름이 없는 것이 바로 깨어 있지 못한 것입니다. 당연히 기름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음'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성령'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귀중한 비유말씀이 나옵니다. 즉, 깨어 있지 못한 자들의 행태가 어떠한지 보여주는 비유죠. 

 이 5처녀는 자신들의 등잔에 기름이 없는 것을 알고,  9-10절에 보면, 그 기름을 구하기 위해서 '사러 나가는 행위'를 합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종교활동'입니다.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은 이 핵심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꼭~~~

 

 예수님은 이런 5 처녀의 행위를 '깨어있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간에 '다 졸며 잘새'라는 문장을 집어 넣으셔서 모든 인간의 삶은 다 '죽은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은 매우 쉽습니다. 그런데 그 강을 건너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복음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에서 진리로 넘어가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두 발을 동시에 담그고 둘 다 취하는 형태를 하면서 본인은 그것을 최선이라고 생각하죠.

 

 확율=비유입니다. (( 50% 사람들은 이 복음의 강을 보지도 못한 채 죽습니다. 나머지 30% 사람은 이 강을 보면서도 건널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물 한바가지씩 사용하여 '잘살기'에 이용만 하죠. 나머지 19% 사람은 이 강을 보면서 강을 건너는 방법과 이유를 이해하지만 바라만 보며 묵상만 하죠. 나머지 1% 사람들만 성령께서 허리끈을 잡아서 강을 건너게 합니다. - 이자들은 매우 적은 수 '소수'라고 성경을 말합니다. 진짜 진짜 복음에 눈을 뜨고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알 수 있도록 간절히 사모하셔야 합니다. ))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더 빨리 복음의 강을 다 건너서 그 복음의 진영에 우뚝 선다면 그 때 이런 기초적인 복음의 설명 보다는 더 차원 높은 복음으로 서로 대화하며 묵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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