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7:39-50(22.03.22.화)

은혜바라기 2022. 3. 22. 08:56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직전,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하죠. 그러면 믿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한 복음적 메세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선택된 자'는 살게 되는데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 '예수님의 십자가 포기'를 종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부주제를 정한다면 바로 '십자가의 선택과 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택된 자들의 삶을 계속 십자가로 몰고 가십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는 이 땅에서 '잘살기, 행복하기'에 합류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믿고 이 땅에서도 행복하기'는 정확히 '내 아내를 80%사랑하고 옆집 아줌마도 20% 사랑하기'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속성 상 불가능합니다. 

 

 대부분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기독교 역사를 가르칠 때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는 경제가 발전하여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 들이고 이후 전 유럽에 조금씩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그 기독교가 전파된 나라 마다 경제가 발전하는 것을 가르치죠. 그런 기독교가 바다 건너 영국으로, 또 다시 바다 건너 미국으로, 또 다시 바다 건너 아시아로 들어오면서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 마다 하나님께서 경제적 축복을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그 현상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은 끔찍합니다. 

 

 복음의 눈으로 본 기독교 역사는 정반대입니다. 고난 속에 기독교가 들어가서 복음의 꽃이 핀 나라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그런 기독교를 무너뜨리는데 사용한 방법은 바로 '경제 부흥'입니다. 즉,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마다 복음이 전파되자 사탄은 곧 '경제 발전'이라는 누룩을 넣어 버리죠. 그래서 모든 유렵의 교회가 텅텅비게 만들었죠. 사탄은 고난으로 교회가 없어질 것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생각하죠. ( 많은 신학자들은 유렵의 교회가 주일학교를 폐지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후 결과론 적인 현상 중 하나를 원인으로 간주한 잘못된 분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 고난을 받게 하여 이 세상의 가치없음을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경영하십니다. 구약을 보고 배우셔야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유대인들은 '광야'라는 고난으로 들어가게 되죠. 그곳은 오직 하나님만 의존하여 살 수 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는 이 고난(자기 십자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칩니다. 우리의 옛자아의 모습은 결국 이 당시 예수님을 희롱하면서 십자가 거부를 종용하는 자들과 똑 같습니다. 

 '엘리 엘리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을 인본주의에 속해 있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육체적 고통과 죽음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영이 죽은 자이며 오직 예수님만이 영이 살아 있는 유일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진짜 영의 죽음을 경험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하죠. 모든 인간은 이미 죽어 있는 자들, 곧 좀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피와 살로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죠. 거듭나는 것, 새로운 창조물이라는 성경의 표현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크죠. 그런데 이런 육체의 죽음은 영적 죽음을 가리키는 상징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실체인 영적 죽음은 어느정도 두려움이 생길까요? 이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겠죠. 오직 유일하게 살아계신 예수님만 느낄 수 있는 공포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영적 죽음, 즉 하나님과의 단절은 우리가 상상 조차 할 수 없습니다. 

 두번째. 예수님은 완벽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모든 율법의 깊은 진의를 100% 다 이루신 분입니다. 완벽한 순종은 그 댓가가 천국입니다. 그런데 버려짐을 당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당연한 의문이 되죠. 그리고 예수님은 당연히 이 의문의 답을 알고 계시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님이 궁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 궁금증를 갖으라는 것입니다. 이 의문의 답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려야 우리가 살기 때문이고 이것을 복음(사랑)이라고 하죠. '  


 포도주를 드시는 장면은 마태복음보다 요한복음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자 예수님은 누구신가? 100% 하나님이신 것은 알지만 과연 100% 인간으로써의 예수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답은 정확히 '나'입니다. 내가 할 수 없으니 예수님이 '나'로 오셔서, 내가 당할, 그리고 내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감당하신 것이죠.

 그 분은 '나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나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제물로 오신 것입니다. 즉, 포도주는 제물된 예수님의 피를 의미하죠. 그 희생으로 그 피 안에 들어 온 자, 즉 그 피를 먹은 자만이 심판을 피할 수 있죠. 이것을 연결해서 말씀드려 볼께요 잘 들으세요 (매우 매우 중요 중요) 스스로 제물되신 예수님의 피를 '나'로 오신 예수님이 마셔서 '내'가 완벽하게 천국에 입성함을 '다 이루었다'로 선언하신 것입니다.(죽은 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전부 다 하실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이것만 믿으셔야 합니다. 믿음은 이것에서 벗어나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내 아들이 서울대를 갈 수 있어 나는 이 정도 믿음이 있어' 라는 식의 종교와 감히 비교도 하지마세요. 

 마태복음은 여기서 죽으시지만 마가복음은 여기서 마지막 한 단계가 더 있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전 문단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곧 '나'로 오신 것이라고 했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것은 결국 '나 (선택받은 자들)를 아버지 손에 넘기는 것'으로 모든 사역을 종료시키는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 복음으로 본 십자가 사건을 대한 느낌이 어떠세요? 감격이죠? 인본주의 종교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합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전 역사 중에 왜 하필 2천년 전 그 당시 유대인의 사회로 오셨을까요? 예수님이 이때를 결정해서 오신 것도 시, 공간적인 복음 메세지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사회란 결국 지금의 기독교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기독교 종교에 대한 정의를 '바리새인'으로 해석을 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런 환경을 선택하여 오셨다는 메세지는 '모든 교인은 교회에 들어 가게 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이 되어 간다'라는 메세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을 나쁜놈이라는 안경을 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문헌에서 보면 바리새인은 최고의 교회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많은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정말 존경받는 목사들이 있죠. 말씀에 충실하고, 인격적인 삶을 사는 완벽한 분들이 간혹 계시죠. 그런데 그런 분들도 이 '바리새인'에 대하면 한참 모자랍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몇 일씩 금식하고 그 금식한 돈으로 재산을 축척하지 않고 고아와 과부를 돕고 목숨 바쳐 성전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심한 욕을 하셨죠. 왜냐하면, 바리새인의 이런 모습은 복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교인은 교회에 들어가게 되면 '휼륭한 신앙인'을 목표삼아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목표하면 안됩니다. 이것을 목표하는 순간 십자가의 가치는 박살나는 것입니다. ( '휼륭한 신앙인 되기'를 발버둥치는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본 '예수님을 보고 -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외친 자들의 모습입니다. ) 우리는 반대의 길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휼륭한 신앙인'이 절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소망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기하시죠? 교회에 등록해서 똑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한쪽은 '신앙생활 잘하기'에 매몰되어서 '칭찬받은 교인'이 되어가고, 다른 한쪽은 '참신앙생활을 절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냥 똑 같은 '신앙생활'이지만 그 길의 끝은 완벽하게 반대방향으로 걷게 되는 것이 신기해 보이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한 눈끔 눈을 뜨고 계시는 것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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