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오늘은 4복음서를 전부 교차하여 복음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십자가는 사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입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바로 '시몬란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입니다. 이 시몬은 바로 '나'입니다. 선택받은 자의 삶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삶의 종착역은 '잘살기'가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나의 옛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죠. 이 옛자아를 못박아 죽이는 것을 표현한 것이 '해골이라는 골고다 언덕'입니다. 인생의 실체를 표현한 것이 바로 '해골이라는 골고다 언덕'입니다. 인본주의를 표현한 것이죠. 우리는 인생을 아름답게 끝내고 싶어하죠.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바는 그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비참하게 죽게 만드셨습니다. 점점 더 늙고, 병들고, 약하게 만드셨고 결국 비참하게 죽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신 이유는 바로 인간의 삶 자체가, 즉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부터 비참한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선악과의 순간부터 하나님과 분리가 되었고 그 분리된 상태의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지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생 내내 알아야 하는데 인간은 계속 '잘살기' '아름답게 살기' 위해 발버둥치죠. 그래서 인생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노년기는 인간을 늙고, 병들고, 약하고, 비참하게 만드셔서 인간이 스스로의 상태를 알 수 있도록 하신 최후의 '배려'인 동시에 마지막 '기회'의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괴로운 이유는 바로 '잘살기'가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잘살기'가 잘 안되기 때문에 오는 감정이죠. 그런데 인생 자체가 '비참함'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아리러니하게도 '평강'을 알게 됩니다. )
누가복음은 '시몬의 십자가 대신 지기'에서 다음의 장면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슬피 우는 무리가 따라오니, 그들은 향하여, 나를 위해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리고 산들에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하리요'라고 하죠. 빠르게 해석을 해보면 푸른 나무는 복음의 진영을 뜻하고 마른 나무는 인본주의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 인본주의의 기초는 바로 인류의 탄생이죠. 인류가 탄생하기 위한 기초가 잉태와 젖을 먹이는 것부터 시작하죠. 그런데 그것을 못하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죠. 즉, 인본주의는 심판되어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산들은 인본주의의 꼭대기를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전이 산 위에 지어졌기 때문에 인본주의를 발아래 두는 성전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죠. 그러나 이것이 인본주의에서는 정치, 권력, 인기, 명예 같은 추상적인 꼭대기 부터 나라, 제국, 황제와 같은 실질적인 꼭대기도 의미합니다. 이것들로 나를 덮어 나의 두려움을 가리려는 행위입니다. 좋은 예가 우리가 인간의 정치에 의존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극에 이르면 교인이 정당을 믿고 의지하게 되고 심지어 정치를 하려고 나서기 까지 합니다.
'예수께서 포도주를 잠깐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하죠. 이것은 성찬식 때 말씀하신 대로 '일이 다 이루어지기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라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즉, '아직 십자가에서 복음을 이야기할 것이 남아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포도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이제 일을 다 마쳤다는 뜻이죠.
요한복음에서 보면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그분의 옷을 4개로 나누어서 각각 나누어 갖고 통으로 짠 속옷도 취하죠. 그리고 이 통으로 짠 속옷을 제비 뽑아 갖자고 합니다. 이것은 구약에 나온 말씀의 성취죠. 예수님의 두 옷은 각각 '말씀과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잘 이해하셔야합니다. 성경은 두 가지 옷을 입고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옷과 복음이라는 옷을 입고 입죠. 말씀은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자기들 마음대로 찢어서 해석하죠. 그래서 땅의 숫자 4로 이해를 합니다.( 땅은 인본주의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복음의 옷은 통으로 짜여져서 절대 찢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자의적 해석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자의적 해석, 즉 자기 마음대로 가져갈 수 없는 재비뽑기로 표현이 되어 있죠.
마태복음에는 없지만 요한복음은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아래에서 쳐다보고 있던 제자 한명을 가리키면서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시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죠. 이것이 바로 '교회의 탄생'입니다. 십자가 아래 모인, 혈과 육이 아닌 복음으로 연결된 선택된 자들의 모임을 말하죠. 이 때가 바로 교회의 생일입니다.
이 후 장면은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를 붙였더라'라고 되어있죠.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은 선택된 자들의 왕이라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죠. 이 장면에서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나를 위해 이 기도를 하셨음을 고백하는 것이 가장 휼륭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나'를 위해 하고 계시는 기도입니다. 즉, 과거형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 동시진행형으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나의 구원은 나의 헌신, 믿음, 십일조, 봉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 기도 때문에 이루어지고 있는 중(ing)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유명한 좌, 우에 달린 강도 이야기 입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자세히 기록이 되어있죠. 일단 두가지를 정확히 설명합니다. 이 두 사람을 분명하게 마태는 강도라고 하고 누가는 행악자라고 합니다. 즉, 선택된 자나 심판을 받는 자나 둘 다 똑같은 행악자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변화될 수도 없고,성화될 수도 없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인격, 변화, 성화는 전부 다 거짓입니다. 전부 다 누룩이에요. 우리는 전부 전적타락한 존재입니다. 신앙생활의 마지막은 성화된 인격체가 아니라 죄인 중에 괴수라는 나의 본질을 깨닫고 끝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된 자들과 자신이 인격자(성공자)로 남게 된 자로 착각하는 자들로 나뉘게 되죠. 그런데 이것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태초에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으로 결정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선택이죠.
이 후 매우 중요한 장면이 나옵니다. 정말 정말 잘 들으셔야합니다. 하루속히 기독교 종교에서 빠져나와 기독교 복음으로 들어가야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여기서 중요한 장면은 좌측으로 예측되는 강도, 즉 유기된 자의 말입니다. 그가 이렇게 예수님께 이야기하죠.(이해하시도록 존대말로 바꾸어 보죠) "주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아니십니까!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완전히 지금 교회에서 말하는 신앙고백과 똑 같죠. 교회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결코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마지막 주님의 대인 사역을 통해 확증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측으로 예측되는 강도, 즉 선택된 자의 고백을 들어보죠. 일단은 인본주의 종교인(좌측의 강도)의 말을 적극적으로 책망합니다. '그 사람을 꾸짖어'라고 표현이 되어 있죠. 복음에 들어온 자는 기존의 인본주의 종교인을 책망하게 됩니다.(이 '책망'이라는 말을 히브리어 사전에서 찾으면 '설교'라는 말입니다. ) 그리고 그 인본주의 종교인의 실체는 바로 나의 옛자아입니다. 우리가 다른 교인들을 책망하지만 그들은 결국 '객관화된 나'일 뿐입니다. 즉, 우편의 강도의 진짜 실체는 바로 '거듭난 나'이며, 왼편의 강도의 진짜 실체는 '나의 옛자아'입니다.
그리고 그 좌측의 강도에게 "왜 죄인이 하나님을 두려워 안하냐?"라고 책망합니다. 조금 쉽게 풀어서 말씀드리면, 지금 교회에서 늘 하는 신앙고백 즉, '예수를 그리스도라하고 나를 구원해달라'라는 그 말을 '죄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의 행위'로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준을 '나의 바램'으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지옥가는 죄인임'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자세입니다. 이런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를 한다고요? 남을 위해 봉사를 한다고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 입니다. (구원은 기도, 봉사등의 행위의 문제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우측 강도의 말을 보죠.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라고 하죠.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죠. 나의 위치는 그냥 죄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교회 등록이 되었다고, 신앙고백을 한다고 죄인에서 벗어나서 의인이 되는 착각에 빠지면 안됩니다. 성화를 하고 있다고요? 변화를 하고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하지? 이게 뭐지? 이게 다 인가? 맨붕에 빠질 수 밖에 없죠. 그런데 그 다음 구절에 보면 진정한 복음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우측 강도는 "예수님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라는 고백을 하죠. 즉, '예수님만이 오직 의인이다.' 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천국에 가겠다'라는 것과 '예수님만이 천국에 가실 수 있다'라는 고백의 차이입니다. 이 차이를 아셔야합니다. 이것 이상의 신앙고백이 없죠.
그 다음의 우측 강도의 말이 핵심이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오직 천국은 예수님만 갈 수 있으시고 그 분이 나를 기억하는가? 안하는가? 에 따라 나의 최종위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죠. 여기에 우측 강도의 행위나 기준은 모두 빠져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행위를 통한 성화나 변화 그 어떤 것도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선택(기억)" 오직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드디어 이렇게 선언하시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시죠. 이렇게 분명하게 '이 자는 천국에 들어간다'라고 확정한 인물이 없습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매우 강력한 힌트입니다. 그리고 이 사역이 예수님의 마지막 대인사역이라는 것은 더욱 더 큰 의미가 있죠. 그런데 만약 이렇게 강도짓만 한 자가 '천국행 선언'을 받은 후 기적적으로 죄를 사면받아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변화된 생활을 한다는 결말이 되면 이것이 '복음의 최종적 해석'이 되겠죠. 바로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인본주의 드라마죠. 그러나 복음은 이런 결말을 취급 조차 안합니다. 삭제해 버리죠. 그냥 이 우편 강도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같이 죽죠. 복음을 알게 된 자의 인생도 그 복음을 아는 것 외에는 모두 무가치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아는 참 신앙생활은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 입니다. 0에서 시작하여 1,2,3,4,5. . . 등으로 더해가는 성화행위가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성실한 신앙생활을 1,2,3,4,5....로 쌓는다 해도 결국 나의 진짜 가치인 0이 곱해져서 0일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 "진짜 신앙 생활"입니다. 그래서 오직 나는 외부에서 100의 긍휼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 100이 누구일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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