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어제 묵상한 3단 복음논법으로 해석을 해봅시다. 1단계 -시험을 참고 시련을 잘 견뎌서 우리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어야 합니다 2단계 -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나’는 단 한가지의 시험 조차도 제대로 견뎌지지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단계 -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 대신 오셔서 모든 시험을 다 참고 견디셨죠. 그런데 이것을 알게(믿게) 된 나도 예수님의 지체로 인정되어 그 분의 견딤에 참여가 된 것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이것을 복음(복된 소식)이라고 하죠.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만을 ‘사랑하시는 자’라고 선언하셨고 생명의 면류관(부활)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매우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보통 교회의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생명의 면류관(천국)을 주신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아는 자들은 오직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을 사랑하시고 그 분만을 천국으로 데려오신 것을 알게 되죠.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나에게 '너는 나의 신부(지체)다.'라고 알려(믿음) 주셔서 예수님과 같이 천국에 참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 두 차이를 완벽하게 이해하셔야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런 사실을 어느 순간 알게 된 것은 나의 이해가 아니라 성령께서 알려 주신 것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때 부터는 나는 나의 삶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삶(십자가)만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절은 우리의 옛자아에게 해당하는 말씀으로 다시 시작합니다. 즉, 시험이 왜 생기는지에 대하여 설명을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친히 내린 시험이 아닌 우리의 욕심에 미혹된 것이라고 하죠. 정확하게는 우리 속에 있는 옛자아 때문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이 개념을 알기 위해 잠깐 요한 계시록을 생각해 보죠. 많은 사람들이 요한 계시록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그 분을 믿지 않는 자들을 벌하시고 지옥에 가두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완벽하게 틀린 말입니다. 인본주의 종교에서 만든 신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해석하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배신한 자를 처벌하죠. 이 개념으로 하나님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러실 필요도, 이유도 없으신 분입니다. 오직 그 분은 ‘그 분의 사랑하는 자녀’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즉, 요한계시록은 전부 그 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즉 복음이 들리는 자들을 위한 책입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자와 벌받는 자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와 유기된 자로 구분하는 것이 올바른 구분법입니다.
이런 개념으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친히 시험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런 개념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동성애’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이유는 그 관계를 통해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가르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유기된 자, 즉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게 된 자들은 그 목적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죠. 이것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내버려 둔다.(유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으로 유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즉, 인본주의에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니 남자와 남자끼리 사랑을 하는 동성애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통해서는 절대 예수님과 신부된 교회의 관계를 설명할 수가 없죠. 즉, 완벽하게 복음에서 벗어난 삶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동성애라는 행위를 하는 자들은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다.'로 해석을 하시면 안됩니다. '동성애'는 '인본주의'의 어떤 속성을 가르치기 위한 '표지판'입니다. 인본주의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 벗어난 것, 즉 죄의 실체죠. 이 인본주의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도구로써 '동성애'를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영적 동성애'의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적 동성애자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난 동성애자와 같은 죄인이 아니야.'라고 외치는 자들이 오히려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영적 동성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동성애를 하나님이 시험삼아 내려 주면서 ‘어떻게 하는가?’ 보고, ‘그것에 맞추어서 벌을 내릴 것이다.’로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게 된 분들은 이런 방향성에서 이제는 벗어나셔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옛 자아는 항상 욕심으로 인본주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시험이라는 것에 놓이게 되죠. 즉, 나의 옛자아의 욕심으로 우리는 죄라는 인본주의를 추구하죠. 그 추구의 끝은 사망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결론입니다. 아주 명백하죠.
여기서 '사망을 낳는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사망으로 ‘끝난다’가 아니죠. 즉, 심판(영적 사망)은 하나님과 분리된 채 영원히 살아가는 첫 단계라는 말입니다. 이 단계가 바로 우리의 인생에서 결정된다는 것이죠. 달리기로 치면 인생80년 혹은 육체의 죽음은 정확하게 출발선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80년의 인생이 아닙니다. 80년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의 시간 동안 우리는 '복음'을 알게 되어 '눈을 뜬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경주는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임을 아시고 그 분의 등에 업히세요. 대부분은 그 분을 쫓거나 그 분과 경쟁을 하거나 그 분과 상관없이 홀로 열심히 달리기를 하죠. 이런 모든 이들의 특징은 기준이 바로 '나'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직 예수님만이 달리기를 할 수 있으시며 그 분만이 승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분의 등에 업히는 것이 전부 입니다. 이것을 '오직 예수님만을 소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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