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여기서 ‘듣기’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란 나의 내부에서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과 비슷한 말씀을 예수님께서도 하신 바 있죠.
“마15: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오늘의 말씀이나 마15장의 말씀이나 모두 인간을 중심으로 외부와 내부로 구분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정확하게 복음과 인본주의로 구분한 것입니다. 복음에 눈을 뜨신 분이라면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지 않거나 아직 그 단계에 있지 않은 분들은 이런 해석이 매우 어색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명퀘하게 설명해 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외모에 신경 쓰지말고 너의 내면에 신경써라'는 말을 듣곤 하죠. 이 말은 세상을 오래 살다 보면 외모 보다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지식이나 성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죠. 재미 있게도 하나님은 복음과 인본주의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런 세상의 깨달음 조차 창조해 놓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사실 복음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설명해 놓으셨죠. 단지 그것을 볼 수 있는 자들과 보지 못하는 자들만 있을 뿐이죠.
모든 천지창조의 피조 세계는 오직 복음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바벨탑을 쌓으러 하나님과 분리해서 밖으로 나갔죠. 이것을 단계적으로, 시각적으로 설명한 것이 선악과 사건입니다. 선악과 에피소드는 인본주의의 탄생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죠.
그래서 영적 세상에서 보는 이 세상의 색깔은 오직 두 개 뿐입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복음)입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두움, 흰색과 검은색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밤, 어두움 그리고 검은색을 허락하신 이유가 바로 낮, 빛 그리고 흰색을 설명하기 위해서죠.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하루 하루 창조하시면 마지막 부분에 계속 하신 말씀이 생각나시나요? "저녁.. 아침.."
“창1:5...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
왜 저녁과 아침이 창조의 결론이자 반복인지 아셨나요? // 저녁=예수님이 없는 (빛이 없는) 인본주의 세상, 아침 = 예수님(빛)이 있는 복음의 세상 // '천지창조'란 첫째 날 부터 여섯째 날 까지 모두 인본주의라는 죄와 어두움에 처한 세상을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아침으로 만드시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란다. 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복하시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인본주의에 묶여 눈이 먼 우리는 이 말씀을 단지 우리의 삶에서 흔히 느끼는 ‘저녁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는구나.~~~~!’ 의 자연현상 정도로 알고 넘어가죠.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눈이 먼 장님이기 때문에 그냥 다 지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자꾸만 장님의 눈을 뜨게 만드는 포퍼먼스를 하신 것이죠. 그런데 이 포퍼먼스 조차 인간은 ‘기적’이라는 행위로 바꾸어서 자기의 삶 중 ‘잘살기’에 보템이 되는 쪽으로 이용하고 해석하죠.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그 자리를 ‘피하신 것’입니다. 즉,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곳에는 내가 있지 아니하다.’를 또 다시 설명하시는 것이죠. (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서 정말 얼마나 열심히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고 계시고 있는지 이제 아시겠죠? )
사실 인간이 못 듣고 못 봐서 그렇지, 하나님께서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설명하고 계신 중(ing)입니다. 심지어 직접 인간(인자 예수님)으로 내려오셔서 설명하시고 심지어 십자가까지 지시면서 말이죠.
그래서 오늘의 말씀에서 ‘듣기와 말하기’는 나를 기준으로 외부와 내부, 즉 신본주의(복음)와 인본주의를 뜻합니다. 고로 복음은 속히 듣고 인본주의는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행위를 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더디 하라고 하신 이유는 인본주의를 통하여서도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 즉, 인본주의를 더디하라는 것은 그 인본주의를 무작정 쫓지 말고 잘 살피고 살펴서 그 안에 복음을 설명하는 것만 취하라는 것입니다. )
특히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하시고 그 다음 바로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하시죠. 왜 이것을 따로 분리하셨을까요? 말하기는 바로 인본주의, 즉 인간의 기준를 뜻하는 것이라고 했죠. 그런데 ‘말하기’가 ‘인간의 기준’을 강조한 것이라는 것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내기’를 추가하여 우리의 이해를 도우신 것입니다.
인간이 성을 내는 이유는 정확하게 ‘나의 기준이 묵살될 때 나오는 반응’입니다. 반대로 설명을 드리면 그 어떤 누구도 미치지 않고서야 자기의 기준에 완벽하게 맞추어 주는 사람에게 성을 내지 않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셨나요? 그래서 그 다음 구절에서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준, 즉 인본주의는 절대 ‘의’를 이루지 못한다. 조금 의역하면 ‘절대 천국에 갈 수가 없다.’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을 반증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잘 들어 보세요. ( 이렇게 서선서는 모든 성경보다 더 복잡하고 깊습니다. )
즉, 오직 의로우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런데 성내는 것, 즉 자기 기준으로 행동하는 것은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신 것은 바로 예수님은 절대 자기의 기준대로 살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기준으로 평생 사신 후 하나님의 기준으로 죽으셨고 하나님의 기준대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다시 복음서에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요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요한복음 5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기준대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기준대로 하셨기 때문에 결국엔 ‘의롭다’ 고 하셨죠. 즉, '의롭다'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완벽하게 이행하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체가 '의'가 되는 것이죠.
모든 성경은 이렇게 복음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이 멀어서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할 뿐이죠.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목사들도 눈이 먼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바는 엉터리가 많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잘 이해할 수 있고, 재미있게 들을 수 있고, 쌓을 수 있는 삶을 제시하는 설교를 하게 되죠. 그리고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성도들은 더 논리적이고 더 인과율이 넘쳐나는 설교를 만날 때 ‘은혜로운 설교’라고 판단하죠.
둘 다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복음을 못 보는 맹인이므로 더 완벽한 ‘점자책’을 내어 놓고 주고 받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서 점자책은 ‘맹인이 이해할 있는 인본주의로 구성된 말씀’을 가리킵니다. 손가락으로 더듬 더듬 만지면서 '그런가?' 하지 마시고 눈을 뜨셔서 진짜 말씀을 보세요.
“마15:14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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