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이란 당연히 인본주의를 뜻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심어진 말씀’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야고보서 묵상의 서론에서 말씀드렸듯이 서신서는 선택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인본주의 삶을 살면서 그것을 경계하라고 쓰여진 책이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이렇게 복음에 눈을 뜬다고 해도 인본주의를 경계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 만만치가 않습니다. 정확하게는 불가능 합니다. ‘인본주의를 완벽하게 끊어내고 산에 들어가 살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자들이 중세 ‘수도원 제도’였죠. 그런데 역사적으로 그들은 모두 쇠태 하였죠. 즉, 하나님은 이것이 답이 아니라고 보여준 것입니다. 이런 것을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이 땅의 삶과 영적 세상을 분리하자는 말입니다. 또한 영지주의 중에는 이 땅의 삶은 영적 세상과 분리 되어 있으니 마음대로 타락해도 상관없다는 개념도 있죠.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인본주의를 통해 복음을 알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그런 삶이 얼마나 가치 없는가를 알게 되는 것에 있죠. 그래서 결국 복음되신 예수님의 필요성을 알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됩니다. 여기서 영지주의는 그 첫 단추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그 결과인 '복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는 영적 세상은 오직 ‘지식’에 멈추어 있죠. 그래서 ‘영지주의’입니다. 어렵죠? 어렵지만 오늘은 조금 더 깊은 묵상으로 초대하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 어렵습니다.
저의 묵상을 읽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문구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인본주의와 분리하셔야 합니다.'라는 문구가 많이 등장하죠. 바로 이것이 '영지주의'입니다. (뭐지? 이상한데~~~) 또한 제 글에는 가끔 '말씀대로 열심히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라는 문구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뭐지? 더 이상한데~~) 조금 어렵습니다. 집중해서 들어주세요.
어떤 분이 제 글을 읽고 '영지주의'아닌가? 혹은 '율법주의'아닌가? 혹은 '가끔 신비주의'를 설명하지 않는가? 등등 그 무엇을 가지고 비판해도 전부 맞는 말입니다. 사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온전한 도구는 없습니다. 즉, 십일조라는 율법에 묶여 있는 분에게는 '영지주의'가 그 사람의 회초리가 됩니다. 또한 영지주의적 사고방식에 묶여 있는 분에게는 '율법주의'가 그 사람의 회초리가 되죠.
예수님의 에피소드 두 가지를 소개해 보죠. 예수님은 그 분의 어머니를 보고 '누가 내 어머니냐?' 라고 하시면서 어머니를 부인하셨죠. 이 때 예수님은 완벽한 영지주의 발언을 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오른 눈이 죄를 범하거든 그 오른 눈을 빼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죠. 이 때 예수님은 극도의 율법주의 발언을 하신 것입니다. 또한 죽은 자를 살리시고 기적과 이적을 자주 보이셨죠. 이 때의 예수님은 '신비주의적 행위'를 하신 것입니다.
율법주의, 영지주의, 신비주의는 모두 복음과는 다르지만 그 세 길은 서로 완벽하게 반대 방향의 길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세 방향의 대치점을 예수님은 왔다 갔다 하시면서 말씀을 하셨을까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핵심을 잘 파악하셔야 합니다. 한가지 예를 더 소개해 드리죠. 복음을 잘 알게 된 목사님들의 말씀을 들어 보면 종종 이상한 방향성으로 굳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그 분들의 말년이 이상하게 지는 경우가 종종 생기죠. 그 이유가 뭘까요? 바로 '복음주의'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적 의미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주의'에 완벽하게 몰두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주의'때문에 이상해지는 것은 왜 그럴까요?
'복음'은 완벽한데 그 복음을 알고 있는 '나'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말하는 , 내가 생각하는 복음은 전부 불완전한 길을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맹신하게 되면 '복음' 조차 '복음같은 주의' 가 되는 것입니다. 이 첫걸음이 바로 내가 복음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복음을 모르는 자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 전파의 특성 상 인본주의를 비판하고 책망하는 방향을 벗어 날 수가 없죠. 그런데 이렇게 인본주의를 비판하고 책망하는 그 순간 나도 '복음같은 주의'라는 죄의 손가락을 가진 표지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렵죠? 즉, 복음의 정점에 서서 설교를 하는 가장 휼륭한 목사일찌라도 그 순간 그 분은 '죄인의 표지판'일 뿐입니다. 단지 성령께서 이런 모양이라도 사용하셔서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 뿐이죠. 그런데 단 한사람도 예외없이 '가르치는 자'의 자리에 서게 되면 이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말씀도 주셨죠.
"약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이 간단한 한 구절을 가르치는 자의 자리에 서게 되면 모두 잊게 됩니다.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의 한계죠. 그래서 결국에 다윗도 죽기 전에 타락하고, 솔로몬도 죽기 전에 타락하죠. 심지어 성경은 바울을 포함한 모든 사도들의 '순교'를 다 숨겼죠.
인간의 순교가 굉장히 휼륭한 행위같죠?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최우선으로 부여한 자세가 바로 '죽음을 두려워 하라'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심어 준 '본능'입니다. 즉, 매우 순결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힘들어도 죽지 않고 살게 되죠. 그리고 그 기회의 시간 동안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죽음만을 두려워 하는 존재'가 되면 안되겠죠.
이 부분도 결국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순교자'들이 잘 못 될 수 있다는 비판을 하고 있고 반대로 '죽음을 두려워 하는 자들'도 잘 못 될 수 있다는 비판을 하고 있죠. 제가 지금 계속 반복해서 '그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눈치 채셔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소망이 되시죠. 인생내내 끝임없이 이것을 고민하는 것이 바로 '답'입니다. 여러분이 알게 된 '복음'조차 참 복음이라기 보다는 '복음같은 주의'의 가능성이 크죠. 즉, '복음'이라는 글자가 나의 생각이 붙잡고 있을 때 복음은 복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바로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소망하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같은 주의'에 붙잡혀 있게 되면 그것도 잘못된 표지판이라는 것이죠. 어렵죠? 그래서 절대 내가 안다고 하는 순간 모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그래서 참 크리스찬의 삶은 매우 어렵습니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하고, 주어진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주어진 공동체(나라,가족,회사)에 열심히 봉사해야 하죠. 그런데 진짜 그것을 바라보는 눈은 따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그래서 눈을 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인가? 그것에 봉사하는 내가 얼마나 죄된 존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무르면 ‘우울증(애통)’만 생기죠. 그러나 선택된 자들에게는 이 애통함은 잠깐이고 진정한 목적인 예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셔서 진정한 평강를 주시게 되죠. 이것을 진정한 위로라고 합니다. 이것이 80년 인생 내내 우리의 임무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겠죠.?
그래서 오늘 본문 21절 마지막에 나온 ‘온유함’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온유함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착하고 여리 여리한 마음과 심성이라고 알고 있죠. 그러나 그것은 인본주의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어원으로 보면 온유란 ‘길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야생의 말을 온순한 가축으로 길들이는 것 만큼 힘들고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죠. 그래서 갑자기 ‘온유함(길들임)’이 기록된 것입니다. 나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하나 하나를 온전히 복음으로 해석하고 그 안에서 예수님을 찾는 것을 습관처럼 길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즉, '복음을 알게 되었다'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매일 매일 묵상을 해야 하는 것이죠. 여기서 묵상이라는 것은 제 이 글을 매일 하루에 한번 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하루에 일어난 모든 것을 복음으로 해석하는 자세를 길들이는 것(온유)을 말합니다. 그리고 제 이 글은 그것을 위한 작은 도구일 뿐이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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