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일단 ‘경건’이라는 말부터 정확하게 정의하죠. 한국에서 ‘경건’이라고 하면 대부분 유교적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의 뜻부터 정확하게 알고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이란 한마디로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고 더 풀어서 말하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첫 구절을 풀어 보면 ‘ 누구든지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이 정확하게 십계명의 제 5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되어 있죠. 여기서 부모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안 보이는 하나님은 고사하고 너를 어려서부터 똥 닦아주고 먹이고 입힌 육체의 부모 조차 얼마나 공경할 수 없는지! 얼마나 그 부모에게 수시로 화를 내는지! 얼마나 그 부모에게 등 돌리고 사는지! 그것을 알게 되어 네가 얼마나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는 존재인지 깨달으라는 계명이죠. 즉, 부모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오직 그분은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시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평생을 지내시면 하나님의 의도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죠.
"요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이렇게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분을 공경하신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다.' 즉, '나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경건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이 자의 혀에 재갈을 물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인간이 온 율법을 다 지켜 낼 수 있다면 예수님이 필요 없겠죠. 만약 그런 방법이 존재 했다면 그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셨겠죠. 그러나 인간은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죠. 오직 예수님만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으시고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예배만 받으십니다.
예배의 정의를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전 인류적으로 딱 한 번 뿐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받으신 그 사건 뿐이죠. 우리의 예배는 '이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의 고백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만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인본주의 종교활동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말씀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예배든지 참여하십시오. 그리고 어느 날 눈을 뜨게 되어 복음을 알게 되면 진정한 예배는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드림으로 끝이 났다는 진리를 알게 되죠. 그 다음 부터는 예배의 촛점이 달라집니다. 내가 스스로 드리던 예배에서 예수님의 예배에 참여된 은혜에 감사하게 되죠.
그 다음 구절도 어렵습니다. ‘진정한 경건’이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현실에서의 불쌍한 고아와 과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고아는 부모가 없고 과부는 남편이 없죠. 즉, 잃어버린 양들에게 부모와 남편의 역할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잃어버린 양들을 돌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역하면 예수님께서 선택된 자들의 부모와 남편으로 오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완벽한 경건에 있는 자는 예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 분만이 고아인 교회의 부모가 될 수 있고 과부인 교회의 남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스스로 ‘나는 고아와 과부를 돕는 자가 될 거야’ 라고 한다면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고아와 과부를 돕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행위를 할 수 있으면 하되 그것에 묶여서는 안된다는 말이지요. 그것에 묶이면 결국 그것은 자기 의를 쌓는 결과만 낳게 됩니다. 자기 의를 쌓게 되면 그 공간 만큼 예수님의 의(십자가)가 덜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적으로는 이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의 속성은 불가항력적 은혜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마지막 말씀인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란 바로 인본주의에 묶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본주의에 완벽하게 묶이지 않으신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 없죠. 오늘 말씀에서 복음의 방향성은 놓치면 안됩니다. 이 복음의 방향성 때문에 한번만 더 설명을 드리고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고아를 이용하여 돈을 버는 사람과 고아를 돌보는 사람 중 누가 더 세속적인가요? 당연히 첫번째 사람이죠. 그런데 이것은 진리를 가르치려고 만든 하나님의 표지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아를 돌보며 '스스로 의를 버는 사람(의를 쌓는 사람)'은 진리의 면에서 완벽하게 세속적(인본주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예수님의 십자가)와 반대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꺼꾸로 반복하면, 이것을 가르치려고 이 세상에 고아를 이용하여 돈을 버는 사람과 고아를 돌보는 사람 중 고아를 돌보는 사람을 더 휼륭한 사람이라고 칭하게 되는 질서를 부여한 것이죠. 어렵죠? 그래서 예수님이 휼륭한 바리새인은 욕을 하고 멀리하셨고, 죄인과 창녀 그리고 세리들과 어울리신 것이죠. 진리의 면에서 보면 고아를 이용하여 돈을 버는 사람이 자신이 더 세속적(인본주의)이라는 것을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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